순흥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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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1-15 21:29 조회1,853회 댓글0건본문
순흥 안씨(順興安氏)
순흥(順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풍군(榮豊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성종(成宗) 때 순정(順政)으로 개칭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승격하여 순흥부(順興府)가 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고,
숙종(肅宗) 때 다시 부로 복구하였다가 1895년 군(郡)으로 강등, 1914년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풍군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있다.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고려 신종(神宗:제20대 왕, 재위
기간: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후손들이 광주 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순흥
(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학문(學問)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던 순흥 안씨는
시조 자미(子美)의 아들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3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일기
시작하여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우라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으로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았던 향(珦:개명은 송)은 상호군(上護軍) 영유(永儒)의 손자로, 1260년(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 우 탁(寓 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
賢), 이 색(李 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
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
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향의 아들로 1282년(충렬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우기(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
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8백 권을 검열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
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원(정당문학 원숭의 아들)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구도(舊都)인 개성(開城)의 유수(留守)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하여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
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 첨(李 詹)이 찾아가 보니 원이 나무에 기대어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 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鋼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호부 낭중(戶部郎中)에 추증된 득재(得財:문경공 영화의 아들)의 후손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 석(碩)의 아들 5형제가 뛰어났다.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축(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민 지(閔 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 충렬, 충선,
충숙왕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특히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보(輔)는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역임했다. 축의 아들 종원(宗源)은 우왕(禑王) 때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어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청렴으로 문하찬
성사(門下贊成事)에 발탁 된 후 공양왕(恭讓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진봉되었다.
종원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경공(景恭)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흥년군에 봉해졌다가 태종(太宗) 때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그의 아들 순(純)이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순이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에게 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순이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주하여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숭선(崇善)은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올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정벌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재주와 학문을 인정 받아 황보인(皇甫仁) 후임으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문개(文凱)의 손자
천보(天保:순흥군 천선의 아들)는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서 세종 때 좌의
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부윤(府尹) 지귀(知歸)의 아들 침(琛)은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연산군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사예(司藝) 돈후(敦厚)의 아들로 성종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당(塘)은 장중(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바른 것을 지켜 직무를 행했으며, 의(義)를 행함에 과단성이 있어서 임금에게 아뢰어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 「당적보」에 적고 있다. 연산군이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을 없앴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어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원통
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으며, 이조 판서가 되어 선비를 뽑아 인재 등용에 힘썼다.
강직한 성품으로 오직 나라 일에 전념했으나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었다. 그가 일찍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나갈 때 시(詩)를 짓기를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하겠다던 옛 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 하였다.
당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자 그는 집안이 너무 성(盛)한 것을 염려하여 벼슬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녹으로 받은
것 외에는 모아 둔 재산이 없어 부인이 갑자기 죽자 장사를 치루지 못하여 남에게 빌려서 치르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감복했다고 한다.명종조에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했던 위
(瑋)의 아우 현(玹)이 명종 때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청강사재록(淸江思
齋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청렴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등에 종기(腫
氣)가 나자 의원이 말하기를 "지렁이 즙을 내어서 발라야 한다"고 하니, 그가 이르기를 "한창 봄에 만물이 생생한데 지렁이가 비록 미물이지만 어찌 내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전적(典籍) 기(璣)의 아들 처순(處順)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 인 침(琛)에게 의탁하여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퇴, 다시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와 아는 체만 해도 잡혀 간다 하여 모두 조광조를 소외했는데, 처순은 멀리 구례로부터 올라와 조광조를 만나고 기묘사화로 남쪽에 유배되어 온 현량(賢良)들의 생활을 동분서주하며 구재했다.
그 밖에 순흥 안씨를 빛낸 인물로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와 그림으로 유명했던 정(珽:병조 좌랑 처선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자유(自裕)가 대표적이며, 위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선조(宣祖)로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하사받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순절한 영(瑛:처순의 증손), 역시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대중(大重), 사오(嗣吳)의 부자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던 병찬(秉瓚)과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승우(承禹)가 뛰어났으며, 도산(島山) 창호(昌浩)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진사 태훈(泰勳)의 아들 중근(重根)은 만주 하르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대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라는 유시(遺詩)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애국가를 작곡한 익 태(益 泰)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99,937가구, 417,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항용 -
▣ 김태영 -
▣ 김윤식 -
순흥(順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풍군(榮豊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성종(成宗) 때 순정(順政)으로 개칭하였다. 충목왕(忠穆王) 때 승격하여 순흥부(順興府)가 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고,
숙종(肅宗) 때 다시 부로 복구하였다가 1895년 군(郡)으로 강등, 1914년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풍군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있다.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고려 신종(神宗:제20대 왕, 재위
기간: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후손들이 광주 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순흥
(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학문(學問)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던 순흥 안씨는
시조 자미(子美)의 아들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3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일기
시작하여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우라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으로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았던 향(珦:개명은 송)은 상호군(上護軍) 영유(永儒)의 손자로, 1260년(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 우 탁(寓 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
賢), 이 색(李 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
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
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향의 아들로 1282년(충렬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우기(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
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8백 권을 검열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
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원(정당문학 원숭의 아들)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구도(舊都)인 개성(開城)의 유수(留守)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하여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
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 첨(李 詹)이 찾아가 보니 원이 나무에 기대어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 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鋼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호부 낭중(戶部郎中)에 추증된 득재(得財:문경공 영화의 아들)의 후손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 석(碩)의 아들 5형제가 뛰어났다.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축(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민 지(閔 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 충렬, 충선,
충숙왕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특히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보(輔)는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역임했다. 축의 아들 종원(宗源)은 우왕(禑王) 때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어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청렴으로 문하찬
성사(門下贊成事)에 발탁 된 후 공양왕(恭讓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진봉되었다.
종원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경공(景恭)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흥년군에 봉해졌다가 태종(太宗) 때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그의 아들 순(純)이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순이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에게 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순이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주하여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숭선(崇善)은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올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정벌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재주와 학문을 인정 받아 황보인(皇甫仁) 후임으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문개(文凱)의 손자
천보(天保:순흥군 천선의 아들)는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서 세종 때 좌의
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부윤(府尹) 지귀(知歸)의 아들 침(琛)은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연산군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사예(司藝) 돈후(敦厚)의 아들로 성종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당(塘)은 장중(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바른 것을 지켜 직무를 행했으며, 의(義)를 행함에 과단성이 있어서 임금에게 아뢰어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 「당적보」에 적고 있다. 연산군이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을 없앴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어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원통
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으며, 이조 판서가 되어 선비를 뽑아 인재 등용에 힘썼다.
강직한 성품으로 오직 나라 일에 전념했으나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었다. 그가 일찍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나갈 때 시(詩)를 짓기를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하겠다던 옛 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 하였다.
당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자 그는 집안이 너무 성(盛)한 것을 염려하여 벼슬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녹으로 받은
것 외에는 모아 둔 재산이 없어 부인이 갑자기 죽자 장사를 치루지 못하여 남에게 빌려서 치르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감복했다고 한다.명종조에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했던 위
(瑋)의 아우 현(玹)이 명종 때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청강사재록(淸江思
齋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청렴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등에 종기(腫
氣)가 나자 의원이 말하기를 "지렁이 즙을 내어서 발라야 한다"고 하니, 그가 이르기를 "한창 봄에 만물이 생생한데 지렁이가 비록 미물이지만 어찌 내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전적(典籍) 기(璣)의 아들 처순(處順)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 인 침(琛)에게 의탁하여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퇴, 다시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와 아는 체만 해도 잡혀 간다 하여 모두 조광조를 소외했는데, 처순은 멀리 구례로부터 올라와 조광조를 만나고 기묘사화로 남쪽에 유배되어 온 현량(賢良)들의 생활을 동분서주하며 구재했다.
그 밖에 순흥 안씨를 빛낸 인물로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와 그림으로 유명했던 정(珽:병조 좌랑 처선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자유(自裕)가 대표적이며, 위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선조(宣祖)로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하사받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순절한 영(瑛:처순의 증손), 역시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대중(大重), 사오(嗣吳)의 부자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던 병찬(秉瓚)과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승우(承禹)가 뛰어났으며, 도산(島山) 창호(昌浩)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진사 태훈(泰勳)의 아들 중근(重根)은 만주 하르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대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라는 유시(遺詩)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애국가를 작곡한 익 태(益 泰)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99,937가구, 417,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항용 -
▣ 김태영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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