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전서공파 소개자료 02 ---益精·益廉 형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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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1 04:55 조회1,544회 댓글0건본문
■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9/10 12:40 (from:61.40.41.61) 조회 : 92
김익정(金益精)이 모친께 드리는 제문
아, 본성이 착한 분이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입니까. 곧고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나 스스로 근검을 힘써 실천 하였습니다. 17세에 부친의 배필이 되어 훌륭한 부도를 갖추시고 집안 살림을 법도에 맞게 하였습니다. 시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방도가 있으시어 어리석은 저를 또한 장성하게 하셨습니다. 족친에게 은혜롭게 하고 이웃 마을에 까지 사랑이 미쳤으며 노소의 비복(婢僕)들을 두루 어루 만지고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옛적 약관의 나이가 지난후, 벼슬에 나가 영화롭게 봉양할 뜻을 두어 책을 끼고서 학문에 종사하여 대과에 급제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판(仕版)에 올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노력하여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음식을 봉양하고 안부를 여쭙는 일을 일찍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멀리 계신 어머니를 뵙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한순간도 떨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지낼 뿐이었으므로 마음이 매우 슬펐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면 곁에서 모시고 저의 직분을 다하여 여생을 위로해 드릴 날이 꼭 있을 것이라 생각 하였으니, 간절한 이 회포는 실로 하늘이 살펴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난해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받드니, 지난날 잘못을 후회하여 깨닫고 이제야 옳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번 편찮으시더니 쾌차하지 못하시고 그길로 이렇게, 길이 어긋나 저에게 영원한 슬픔을 품게 하였습니까.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저의 허물입니다. 효도 할날은 짧고 충성을 바칠 날은 길다는 예전 사람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조모께서 오히려 당에 계시니 기거 안부를 살피는 부지런함을 어머니의 뜻에 이어 실추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수 한잔 술을 떠서 영전에 바치고 제문을 읽습니다. 영령께서는 곁에 계실 터이니, 아. 흠향하소서.
아, 어머니께서는
저를 길러 장성하게 하셨으니
고생 고생 저를 기르시며
영화로운 봉양 보리라 여겼습니다.
하늘이 저를 불쌍이 여기지 않아
홀연히 어머니를 잃게되니
나가서는 안부를 물을곳이 없고
돌아와서는 이를데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욱 아팠으니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던 일
꿈속 같은데
저의 이 생이 마치도록
다시 할수 없습니다.
어머니 께서 만들어 주신 옷이
아직까지 저의 몸에 있는데
지금 후한 녹을 받기에 이르러
어머니께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덕을 갚을지
하늘을 우러를 따름입니다.
아, 아름다운 우리 임금께서
저를 공신이라 일컫고
어머니의 작호를 내리시어
한국부인이라 하셨습니다.
춘정집(春亭集)에서 옮겼습니다.
춘정집에 익정 선조님 과의 관계된 시도 몇편 있는것으로 보아
춘정 변계량 선생과 가깝게 교유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10/08 19:01 (from:220.70.61.159) 조회 : 32
형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의 졸기(卒記)
--형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이 졸(卒)하였다.
--익정의 자는 자비(子斐)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을과(乙科) 제 1등에 합격하여 여러번 천직(遷職)되어 습유(拾遺)·헌납(獻納)·장령(掌令)·지사간(知司諫)·대언(代言)에 임명되고, 나가서 충청·전라·경기 삼도(三道)의 감사를 지내고, 들어와서 동지총제(同知總制)·경창부 윤(慶昌府尹)·대사헌, 이조·예조·형조 삼조의 참판을 거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갔다.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사를 내렸다.
--아들 둘이 있으니 김숙(金潚)과 김형(金泂)이었다.
≪출전 : 세종실록 71권 세종18년 1월26일(임진)≫
■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04/24 20:11 (from:211.239.251.62) 조회 : 50
김익정(金益精)의 가족관계
박안생(朴安生)은 전의(全義)의 명족(名族)인 안동김씨 한성좌윤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둘째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가 근처로 이사하니 그가 살던 전의읍치 북쪽의 상(上), 중(中), 하대부리(下大夫里) 일대를 박동(朴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한다. 현재의 전의면 관정리(觀亭里) 일대이다. 상대부리는 전의읍치에서 7리, 하대부리는 5리 떨어진 곳이다.
박안생(朴安生) 의영고사(義盈庫使), 목사(牧使)를 지냈다.
자(子): 박중림(朴仲林) 한석당(寒碩堂)1400 ~1456) 이조, 형조판서를 지냈다.
손(孫): 박팽년(朴彭年) 취금헌(醉琴軒)1417 ~1456) 사육신 시호 충정이다.
“전의읍지에 의하면 집 부근에 한석정(寒碩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있었다. 따라서 박중림은 외가가 있는 학당리에서 탄생하여 박동에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익정(金益精)1375~1436)은 박중림의 큰외숙으로 태조5년(1396) 근정전 친시과에서 장원급제한 재사 이었는데, 재주뿐 아니라 인물도 빼어나게 잘생겨서 일찍이 태종의 눈에 띄어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친다음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때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발탁되어 세종의 측근이 된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8월8일) 하자마자 좌부대언즉 좌부승지가되어 우대언, 좌대언을 차례로 거치면서 세종2년(1420) 12월9일에는 지신사(知申事)즉 도승지에 오르고 세종4년(1422)12월12일 파직 될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좌석 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侍宴)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사람들의 시기를 사게되어 하찮은일로 파직되지만 충청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참판, 이조참판, 호조참판, 한성부윤,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등을 역임하고 세종15년(1433)과 세종16년 양차에 걸쳐 하정사(賀正使)와 성절사(聖節使)의 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다. 특히 하정사가 되었을 때 부사는 누이의 손자인 박팽년의 외조부 김익생 이었으니 사돈간에 정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된셈이다. 또 김익정은 절제 김종서의 재종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김종서는 “단종실록”권2 단종즉위년(1452) 임신(壬申) 7월4일 을미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종서가 이르기를… 김익정은 바로 내 재종형이라 내가 사람됨을 상세히 안다. 염치와 절개를 스스로 지키고 신의와 과단을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국량이 좁다고 한다면 그럴만 하지만 사헌부의 장이되어서는 남의 뇌물을 받았다면 결단코 그리하지 않았으리라. 재종형제의 촌수가 성립되는 것은 김종서의 조모가 선산김씨(善山金氏) 우류(右謬)의 따님이라 하였고, 김익정의 모친이 선산김씨라 하였으니 김종서의 조모가 김익정 모친의 고모가 됨으로써 선산김씨를 같은 외가로 하기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김익정의 생질인 박중림과 김종서와도 척분(戚分)이 생기게 되어 김종서가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천거하면서 그가 그의 족인(族人)이라 하였던것이다. 박중림의 장인 즉 박팽년의 외조부인 김익생이 부사가 되고 박중림의 외삼촌인 김익정이 정사가 되어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영광을 누리며, 9월2일에 김익정은 한성부윤이 되고 10월30일에는 김익생이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며 11월16일에는 다시 예조참판 김익정이 성절사 정사가 되어 명나라로 사신이 되어 간다. 그리고 세종17년(1435) 을묘 3월21일 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김익정이 돌아와 3월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을 전담하게 한다. ?이하생략-
조선왕조 충의열전에서 옮김
▣ 솔내영환 - 김종서는 문온공파와도 사돈지간입니다. 문온공의 장현손(문온공-김명리-김맹헌-김자정-김연수)인 김연수(대사헌 역임)의 배위가 김종서의 따님입니다.
■ 작성자 : 김주회
조선초기 활자 인쇄술을 요약해 보면
1) 계미자는 태종3년(계미, 1403)에 주자소를 설치하면서 조선시대 최초로 주성된 동활자이고,
2) 경자자는 세종2년(경자, 1420)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주성된 동활자로 주조기간은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려 완성하였다. 이천과 남급이 주관하고 ★金益精 등이 감독하였다.
⇒경자자 제작감독에는 우리 가문의 전서공파 ★김익정 선조님께서 참여하였다
3) 1434년 초주 갑인자는 이후 6차례 (혹은 12차례) 개주된 바 있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백미로 우리 가문의 군사공파 ★김돈 선조님께서 글자체 및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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