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05---공민왕 재위 중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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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27 22:31 조회1,570회 댓글0건본문
■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996,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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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홍건적(홍두군, 홍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빠져들면서 원과 화해하고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등 다시금 친원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1355년 국호를 송이라고 하고 허난성, 산시성 등지로 세력을 확장한 홍건적은 부분적으로 만주 지역으로 북진하여 요동을 점령하고 원을 위협하다가 원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방향을 돌려 고려를 침범하게 된다. 이에 고려는 1357년에 ★김득배를 서북면 홍두군 왜적방어 도지휘사로 삼아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359년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명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밀려왔다. 고려는 한때 철주와 서경이 함락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이듬해 2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홍건적은 해로를 통해 풍주, 봉주, 황주, 안주 등의 해안 지방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1361년 10월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 등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대대적인 제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양을 떠난다. 하지만 이듬해 1월 고려군 20만이 적장 관선생과 사유 등을 죽이고 개경을 회복한 후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쫓아냄으로써 고려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전소되고 각 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공민왕은 한동안 죽주, 진천 등에서 행궁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한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과 연합할 필요성을 느낀 고려 조정은 그동안 꾸준히 추진하던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에는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관제도 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려 놓는다.
한편으로 홍건적의 침입은 무장들의 힘을 강화시켜 공민왕 초기에 어렵게 복구했던 문신 중용정책이 점차 퇴조되었다.
홍건적 침입의 피해가 미처 복구되지 못해 왕이 아직 개경 입성을 못하고 있던 1363년 윤3월에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려 조정은 또 한번 위기를 겪는다. 공민왕의 환궁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환자 안도적,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지사 김한룡, 우정승 홍언박 등이 목숨을 잃고 공민왕도 살해될 뻔하였으나 안도적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였다.
반란군은 곧 변란소식을 듣고 달려온 ★최영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된다. 그런데도 김용은 이때 술책을 부려 한동안 목숨을 유지하며 1등공신에 올랐다가 나중에야 사건전모가 밝혀져 사형된다. 그리고 안을 진압한 최영, 오인택 등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한때 개경 수복에 공이 컸던 ★이성계의 존재도 부각된다.
최영과 오인택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공민왕이 채 숨도 돌리기 전인 1364년 정월 원의 왕후 기씨의 사주를 받은 ★최유가 덕흥군 왕혜를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최유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의주를 함락하고 다시 선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최영,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최유는 보름만에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다가 그해 10월 원나라 군사에 의해 포박되어 고려로 압송, 다음 달인 11월에 처형되었다.
고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365년 정월 밀직부사 김유를 원나라에 보내 덕흥군을 고려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원나라측은 덕흥군의 병을 핑계로 고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고려사회가 계속되는 변란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동녕로 만호 박배야대가 연주를 침입하여 ★최영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퇴치하였고,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다음에 계속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솔내 - ~~~
▣ 김항용 -
▣ 김윤만 - 상락군 김득배. 상산김씨중에 김일과 더불어 상락군의 군호를 받은이가 두분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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