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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강화도 해령당(海寧堂)과 해양향(海陽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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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3-25 23:52 조회1,6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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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3/02/08 12:42 (from:211.202.49.31) 조회 : 39

해령당(海寧堂)과 해양향(海陽鄕)의 차이점



해령당(海寧堂)

지금의 길상면 온수리(溫水理) 중앙부위에 해령당(海寧堂)이라 부르는 고

지명이 있다. 이곳엔 성공회(聖公會) 공소가 자리하고 있어 명소로 알려져

있고 성공회는 전국에서 성직자가 제일먼저 배출한 지역이다. 고려 고종(高

宗)때에 도원수 김방경(都元帥 金方慶)이 살던 지역이라 한다. 이때 그곳을

원수리(元帥里)라 했는데 그 살던 고장을 해령당(海寧堂)이라 부르는데 지

금도 역시 고여금(古如今)인가 한다. 김방경(金方慶)은 안동(安東) 사람으

로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 兵馬判官)을 역임하고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

수지를 만들고 강화에서는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수하였다가 겨울에는

음료수로 적용하였다는 설이 있다. 안동에서 장서(長逝)하였는데 고려시대

의 명사이니 지금에는 양도면 삼흥리에 후예가 살고 있다는 설이 있다.

<출전-강도의 민담과 전설> 강화문화원



해양향(海陽鄕)

진강산(鎭江山)의 서편 5리에 있었다는데 오직 지명조차 희미하다. 일설

에 의하면 고려 고종(高麗 高宗)이 이고장으로 천도하여 강화(江華)에서 장

서하시고 뒤를 이어 원종(元宗)이 동극하여 11년만에 강도(江都)에서 개성

(開城)으로 환도하였다. 고종때의 권신 최충헌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우가

강화천도(江華遷都)를 강행하고 궁궐(宮闕)이며 호화주택을 세우고 횡포하

다가 손자 최의에 이르러 집권한지 2년만에 임연(林衍)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공으로 인하여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최충헌의 가복)은 시중(侍中}

에 해양후(海陽候)라 칭하였다. 김인준은 횡포가 심하여 임연에게 피살되었

다. 이것이 와전되어 해령향海寧鄕) 해망(海亡)이라고 부른다. 이 고장은

양도면 건평리(乾坪里) 해망(海亡)이라는 곳 이다.

<출전-강도의 민담과 전설>강화문화원







■ 작성자 :솔내영환 작성일 : 2003/02/03 12:45 (from:211.222.195.62) 조회 : 66

강화도와 충렬공(1) 해령당(海寧堂)



충렬공할아버님께서 무신정권이 강화천도(1232년)이후 개경환도(1270년)까지

39년간을 강화도에 사셨을 것입니다.

이때 사시던 집의 당호가 해령당이라는 자료가 있어 소개합니다.



해령향터(海寧鄕墟)

양도면에 위치한 진강산(鎭江山)서쪽 5 리에 있었다고 했을뿐 문헌에 정확한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대한 전설이 세가지가 있으니 각자 판단에 일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때 지문하성(知門下省)인 송송례(宋송松禮)가 고려 고종(高宗)을 따라와서 늙어서 사임한후

양도면 하일고개 남쪽에 자리잡어 살았는데 그곳을 송로동(宋老洞)이라한 것이 와전되어

송로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때에 시중(侍中)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이곳 해운정(海雲亭)에

살았다는 설이 있는데 두 국가에 공로자를 왕이 이곳에 살도록 특사하고 고을이름을 해령(海寧)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하일리(霞逸里)로 짐작이 간다.



또 한설에 의하면 진강산 서쪽이 아니라 동편 오리쯤이니 길상면 온수리

(溫水里)에 있는 해랑당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고려 고종(高宗)때에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이곳에 살았다하여 원수리(元帥里)로

했었는데 이가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에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 하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한

것이 이곳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고려 원종(元宗)때 별장(別將) 김인준(金仁浚)이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과

도영랑장(都領郞將)임연(林衍) 등과 공모하여 권신(權臣) 최이를 살해한 공으로 해양후(海陽侯)에

봉하였는데 지금의 양도면 건평리(乾坪里)는 김인준이 성장한 고장이라 해양향(海陽鄕)이라 부르던

것이 화전되어 해령(海寧)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인준은 방자하고 횡포를 일삼아 사형을

당했으며 그 일족(一族)이 참화를 입어 다죽으니 해양(海陽)이 변하여 해망(海亡)이 되고 지금

건평리에는 해망리(海亡里)가 있어 와전되어 해망이로 부르게 되었다. 모두 믿을 수 있는 전설이니

참고로 기록에 남긴다.

출처http://www.ganghwayangdo.com/history/history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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