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성호사설: 왜구시말(倭寇始末)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4-04-13 20:07 조회1,719회 댓글0건

본문

성호사설 제14권
no.gif
  ico01.gif 인사문(人事門)
no.gif
  icon09.gif 왜구시말(倭寇始末)주C-001
no.gif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원 세조(元世祖) 때를 당하여 공주를 맞아 들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좇았으니, 비록 나라 일을 주장하지는 못했으나 국운(國運)이 장원하였던 것은 또한 그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보다 앞서 원 나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향도(嚮導)를 삼았는데, 왜인들이 의심하고 모두 죽이려하여 간신히 도망하여 살아 돌아온 자가 있었다. 이에 왜적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충렬왕 7년(1281) 신사(辛巳)에 원 나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동정(東征) 길에 나서니, 전함이 3천 5백 척이요, 만군(蠻軍)이 10여 만 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전선 9백 척과 군사 초공(梢工) 수만여 명으로써 이에 협조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서 양군이 회합하고 이어 참획(斬獲)이 있었는데, 마침 태풍을 만나 만군(蠻軍)이 모두 죽어 시체가 포구를 매워 밟고 다니게 되었으므로 이에 철병하여 돌아왔다.
내가 근자에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얻어 읽어보니 거기에도 또한, “거의 함몰하게 되었는데 요행히 태풍을 힘입어 모면하였다.”고 했으니, 그 징창(懲創)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왜적의 환란이 지식(止熄)되었으니 이는 원 나라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가 쇠약해지자 왜적은 또 다시 침략하였다.
충렬왕 7년으로부터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경인(庚寅)은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10년에 해당되는데, 이에 이르러 왜적이 고성(固城) 지방을 침략했다. 왜적의 환란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약탈이 없는 해가 없었다.
우왕(禑王) 원년(1375) 을묘(乙卯)에 이르러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으므로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지에 거주하게 하고 관가에서 물자와 양곡을 지급(支給)하였다. 얼마 후에 전라도 원수(元帥)김선치(金先致)에게 지령(指令)을 내려 등왜(藤倭)를 유인하여 주연에서 죽이려 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경광(經光)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달아나고 겨우 3명 만을 잡아 죽였다.
이에 앞서 왜적들이 우리 지방을 침략해도 인명은 살해하지 않았었는데 이로부터 격노하여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남김없이 죽이니, 전라도와 양광도(楊廣道)의 해변에 가까운 고을은 어수선하여 마을이 텅 비었다.
다음해 겨울에 나흥유(羅興儒)가 일본에서 돌아오고 일본에서는 중[僧] 양유(良柔)를 회신사(回信使)로 보내왔으니, 대개 충렬왕 7년 신사(辛巳)에 동정(東征)한 후로부터 절교한 지 거의 1백년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일본은 중 주좌(周佐)가 글을 보내왔는데, “오직 우리 서해도(西海道)일로(一路)인 구주(九州)는 난신(亂臣)이 웅거하여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은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 서해도(西海道)의 완만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 지방을 침략한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깊이 그 지경에 들어가 두 진영이 날마다 교전하여 거의 구주(九州)를 수복하게 되었는데, 저들이 해를 가리키며 하늘에 맹세하기를 다시는 해적 행동을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왕 3년에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匪賊)을 금지할 것을 청했는데 길상은 병으로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또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浚)이 중 신홍(信弘)을 시켜 군사 69명을 이끌고 비적을 토벌하게 했으니, 구주는 곧 서해도(西海島)를 가리킨 것이다. 신홍(信弘)이 비적과 싸워 적선(賊船) 1척을 나포(拿捕)하여 모두 참수(斬首)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또 이자응(李子膺)ㆍ한국주(韓國柱) 등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 돌아옴에 미쳐 해도포착관(海盜捕捉官) 박거사(朴居士)가 군사 1백 86명을 거느리고 계림부(鷄林府)에 침입한 왜적과 싸웠는데, 원수(元帥)하을지(河乙沚)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거사(居士)가 패전하여 겨우 50여 명이 살아 남았다. 이 후에 날로 잔폐하여 연해(沿海)의 3면이 왜적의 침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태조[我太祖 조선태조를 가리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함에 미쳐 토동(兎洞)과 황산(荒山)의 승전에서 국위를 약간 떨쳤으나 저들이 바다에 출몰하여 틈을 타서 침입하니, 이를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그 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일이 있었으나 전승을 거두지 못하였고, 삼포(三浦)주D-002의 토벌에도 오히려 남은 앙화가 있었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서는 그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왜인들도 크게 상처를 입어 수길(秀吉)로써 징계를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 편안한 틈을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정포은(鄭圃隱)이 일본에 사신 갔다 돌아올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또 이도(二島)의 침략을 금지했다 하였으니, 이른바 이도는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의 계사(啓辭)를 상고해 보면, “오도(五島)에서 사로잡은 자의 말에 의하면 오도는 대마도의 우편에 있는데 땅이 적고 토지가 척박하여 호수는 1천 호 미만이요,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장사로써 생업을 삼는다 합니다. 이들이 각처에 출몰하여 약탈이 우심하였고 평시에 우리 변방을 괴롭혔던 소수의 비적(匪賊)은 태반이 이 섬에 있는 왜적들이었습니다. 그 침입하는 노정은 오도(五島)에서 동남풍 편에 배를 타고 삽도(三島)에 이르러 유숙하고 선산도(仙山島)를 거쳐 곧장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利浦) 등지에 다다르며, 대마도에서는 동북풍 편에 배를 타고 연화(蓮花)ㆍ욕지(欲智) 두 섬에 이르러 유숙한 후 곧장 남해의 미조항(彌助項)ㆍ방답(防踏) 등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물길이 멀기 때문에 비록 순풍을 만난다 해도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당도하지 못하며, 순풍도 연일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다 가운데에서 정박하고 다시 순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포은(圃隱)의 이른바 이도(二島)는 오도(五島)와 삼도(三島)를 가리킨 듯한데, 이 두 섬은 곧 서해도(西海島) 구주의 변방에 속하니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우며, 그 밖에 크고 작은 여러 섬이 널려 있는데, 이는 모두 구주의 서쪽 변방에 속하는 것이다. 근자에 일본의 신지도(新地圖)를 얻었는데, 신숙주(申叔舟)와 강항(姜沆)의 두 지도에 비교하면 지극히 자세하니, 이를 상고하면 알 수 있다.
서해(西海)의 구주 가운데에 오직 살마주(薩摩州)가 가장 서남쪽에 있다. 30년 전에 우리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에 왜경(倭京)에서 전례에 의하여 공궤의 경비를 배당하니 살마주에서는, “조선의 사행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고 명령을 좇지 않았다 하니, 이들도 또한 이도(二島)와 다름이 없다.
고려 때 진포(鎭浦)의 전역(戰役)에서 왜선이 5백 척에 이르렀다 하는데 저 작은 섬에 어떻게 허다한 함선이 있었겠는가? 주좌(周佐)의 이른바, 서해도(西海道)에 웅거했다는 말이 옳은 듯하니, 나라의 중대신(重大臣)들은 이런 일을 소상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생각건대 삼포(三浦)의 왜적을 토벌한 후에도 그 종자가 아직도 많아 지금도 연해에 향화촌(向化村)이라고 이르는 마을이 이루 손꼽을 수 없으니 고려 때의 글안장(契丹場)과 같은 것이다.
이미 우리 강토에 거주하는 이상 마땅히 우리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제 들은즉 거주(居住)가 별달리 구분되어 있고 남혼 여가(男婚女嫁)도 서로 통하지 않으며 예조 서리에 소속되어 부세도 제멋대로 결정한다고 한다. 저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심리가 같지 않으니, 만약 일조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너와 내가 판연히 갈리어 단결하여 그들에게 호응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어찌 심복(心腹)의 걱겅거리가 아니겠는가? 진(晉) 나라 때 오호(五胡)의 일로써 징험해 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자의 말에는, “만약 당시에 우리 백성과 혼동하여 거주하게 하고 항오(行伍)에 편입하여 정의가 상합하게 했다면 수세(數世) 후에는 변화하여 우리 백성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또한 심사숙고(深思熟考)한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왜인의 성질이 표독하여 원수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한다.” 한다. 중종(中宗) 5년(1510) 경오(庚午)에는 전역(戰役)에서 왜인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는데 인하여 삼포(三浦)의 왜인을 모조리 섬멸하고 왜관(倭舘)을 혁파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의 골수에 맺힌 원한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선ㆍ정(宣靖) 양릉(兩陵)주D-003이 참화를 입었고, 그 후 통신사가 돌아올 때에 국서(國書) 가운데 어휘(御諱)가 들어 있어 그 옳지 않음을 쟁론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사행을 먼저 떠나게 하고 추후해서 고쳐 보냈으니, 나라의 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무심중에 우연히 생긴 일은 아니었다.
임진의 싸움에 수길(秀吉)의 사위가 진주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정유년에 다시 전쟁으로 들어가자 왜인이 비밀히 귀띔해 주는 자가 있더니, 과연 진주(晉州)를 도륙하여 계견(鷄犬)도 씨를 남기지 않았다.주D-004 이 두 가지 일로써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왜적의 정세를 연구하려 하는 자는 상고가 될 것이다.
안백순(安百順)의 말에 “오도(五島)는 일기(一岐)와 평호(平戶) 두 섬 사이에 있는데, 서해도(西海道)의 비전주(肥前州)에 속했으니, 남북이 3백 리요 동서가 혹은 10리 혹은 50리가 된다.”고 하였다.
   
[주 C-001] 왜구시말(倭寇始末) :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전말. 《類選》 卷九上 經史篇七 論史門.
[주 D-002] 삼포(三浦) : 세종 때에 왜인들에 대한 희유책으로 설치한 웅천(熊川)의 제포(薺浦)와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川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이 세 곳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들의 거류 교역의 처소로 삼았다.
[주 D-003] 선ㆍ정(宣靖) 양릉(兩陵) : 임진왜란 때에 선ㆍ정 두늠이 모두 참화를 입었는데, 원문에는 정릉(靖陵)만을 거론하였기에 이에 시정하였다.
[주 D-004] 임진의 싸움에 수길(秀吉)의 사위가 진주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정유년에 다시 전쟁으로 들어가자 왜인이 비밀히 귀띔해 주는 자가 있더니, 과연 진주(晉州)를 도륙하여 계견(鷄犬)도 씨를 남기지 않았다. : 이 기록에는 진주 함락이 정유년의 일이라 했고, 다른 기록에는 계사년의 일이라 했는데, 어느 편이 옳은지 알지 못하므로 원문대로 두었음.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