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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민공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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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4-15 01:45 조회1,4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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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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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01.gif 묘지(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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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09.gif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 시문온공 민공 묘지명 병서 (高麗故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贈諡文溫公閔公墓誌銘) 병서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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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충(李達衷)

내가 젊었을 때에, 대인선생(大人先生)의 문하에서 배우고 모시면서 말씀을 들으니, 선비의 기풍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지금 세상이 옛날만 못하다.”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에 적이 생각하기를, ‘너무도 통하지 않는 말씀이다. 어찌 반드시 그러하랴.’ 하였더니, 그 후에 내가 세상일을 많이 겪어보고 나서야 참으로 그 말이 옳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선배 어른들의 격치 높은 풍류가 날로 줄어들어 적막할 뿐 뒷사람이 법 받을 만한 곳이 없고 보매, 옛 사람을 아쉬워하는 회포가 느낌에 따라 솟아오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급암공(及菴公)과는 친족으로 인친(姻親)이 되어 서로 두터운 정의가 있는 터이므로,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 부인으로부터 묘명(墓銘)의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비루한 솜씨라고 해서 사양하리요.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이요,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급암(及菴)이니, 충주(忠州)여흥(驪興)이 본향이다. 아버지 이름은 적(頔)이니,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密直司使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으로 시호는 문순(文順)이요,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管高麗軍萬戶重大匡上洛君)김흔(金忻)의 따님으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하였고, 조부의 이름은 종유(宗儒)이니,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 치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요, 증조부의 이름은 황(滉)이니, 조산대부 호부시랑(朝散大夫戶部侍郞)이다.
대개 그의 선대에서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어서 심고 가꾼 지가 오래되어 그의 9대 조 칭도(稱道) 봉어공(奉御公) 이하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며 큰 인물이 있어 그의 공로와 위호(位號)가 겹치고 쌓여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잇달았으니, 그것은 그 집에 있는 족보와 나라에 있는 역사책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공이 원정(元貞) 을미년 12월 무진일에 나서,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조부 충순공에게서 자랐는데, 자질이 범인에 뛰어나서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태재(太宰)김 정열공(金貞烈公)이 본래 사람을 잘 안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딸을 공의 아내로 삼게 하였고, 정열공은 손을 좋아하여 당시 명사들을 많이 좇아서 놀았는데, 공이 거기에 보고 느낀 바가 있어 학업이 날로 진보되었다. 처음에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에 보직되었다가 우열(右列)로 옮겨 산원(散員)이 되어 별장에 승진되었으나, 무관직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더욱 힘썼다. 연우(延祐) 을묘년에 우리 동암(東菴)문정공(文定公)이 과거의 주시관이 되어 고열을 몹시 정밀히 하니, 합격한 자가 정원에도 차지 못하였고 뽑힌 자는 실력 없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여기에 뽑혀 들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학문에 힘써 10년의 오랜 세월을 쌓았다. 그때 의릉(毅陵)이 원 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태정(泰定) 을축년에 이르러서야 왕위를 회복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관원을 신중히 선발하니, 공은 예문ㆍ춘추 두 관의 수찬에 임명되고, 또 좌ㆍ우정언과 헌납을 역임하니, 은비(銀緋)와 자금(紫金)의 복식을 그 품계에 맞게 내렸다.
경오년에 영릉(永陵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선비들을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진실로 마음속에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관(武官)의 하는 일을 본받아 아첨하였으나, 공은 그때에 군부정랑 예문응교(軍簿正郞藝文應敎)로 역시 정부에 출입하면서 관리의 인선과 제수에 논의 참여하였는데, 그 절개를 지키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순(至順) 임신년에, 충숙왕이 다시 왕위를 회복하고 크게 관리의 출척을 단행하니, 공은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小君知製敎)봉선계(奉善階)에 재배되었다. 병자년에 봉상(奉常)의 품계에 오르고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서 경상도 염철사(鹽鐵使)가 되어 나가니 백성들이 즐겨하였다. 다시 전교부령 우문관직제학으로 불러들여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 되돌아가 관직으로 예문관에서 성균좨주에 승직하였다. 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전직 중현(中顯)에서 중정(中正)에 올랐으며, 관직은 진현(進賢)으로 고치었다. 나아가 전라도 안렴사가 되매, 은혜와 덕화가 흡족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서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고 춘추관수찬에 충당되었으며, 정순(正順)으로 봉익(奉翊)의 품계에 올랐다. 지정(至正) 임오년에, 판전교(判典校)로서 성균시(成均試)를 맡아 김인관(金仁琯) 등 93인을 뽑았고, 갑신년에 명릉(明陵)이 정권을 잡고는 전리판서를 제수하였다가 감찰대부로 천전되고, 을유년에 밀직으로 들어가서 제학이 되어 상호군을 겸대하였으며, 부사와 지사사(知司事)를 거쳐 다음해에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였다. 2년을 지나서 기축년에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이 원 나라에 가게 되어 공이 따라 갔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로로서 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를 제수하고, 또 수성병의 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이란 호를 내리고 찬성사상의 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승진되었다가 물러나와 한가로이 지낸 것이 8년, 나이 65세로 지정(至正) 기해년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부음이 들리매 왕이 차탄하며 슬퍼하고 문온공(文溫公)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아, 공은 대대로 혁혁한 벼슬을 이어 내려오면서 사업이 창성하였으나, 일찍이 조금도 자랑하는 빛이 없었고, 성품과 자질이 온화 단아하여 친족과 인척을 대하는 데도 화기 애애 화목을 이루고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으니, 마침내는 그가 부끄러워하고 심복하였다. 문사와의 교유를 좋아하여 일찍이 졸재(拙齋) 최선생(崔先生)과 친분이 두터웠고, 더욱 그의 글을 좋아하여 그의 문집을 자기 재력으로 간행하였으니, 돈후하고 충신하여 착한 일을 좋아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정사를 처리하는 데도 거만하거나 괴벽하게 하는 일이 없고, 한결같이 의리에 좇아 할 뿐이었으며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겨하니, 실로 마음이 탄평하고 넓어서 큰 군자인(君子人)이었다. 이러한 공을 본다면 선비의 기풍이 반드시 옛날과 같지 않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돌아갔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일이 날로 새로운 것뿐이고 하니, 나도 또한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 “지금은 과연 옛날 같지 않구나.” 하는 독백이 나도 모르게 나오니, 이는 나도 그 대인선생(大仁先生)의 말을 그대로 믿게 된 까닭이다.
딸 하나를 낳아 명문 집 자제인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김앙(金昻)에게 시집보냈고, 외손자가 둘인데, 공이 몹시 귀여워하고 잘 교양하여 모두 과거에 올랐었다. 맏이는 제민(齊閔)이니, 지금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이고, 다음은 제안(齊顔)이니 직한림원(直翰林院)이며, 외손녀가 넷인데 맏이는 명문의 아들 감문위 참군(監門衛參軍)김사안(金士安)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아직 모두 어린 나이다. 제민의 형제가 초상을 주장하여 예(禮)를 극진히 하여서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감응사(感應寺) 남쪽 둔덕에 장사하였다. 그 명에 이르기를,

공과 같이 넉넉하고 / 如公之裕
공과 같이 순수함은 / 如公之粹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이거늘 / 人所歆兮
어찌 높은 향수를 못하였으며 / 靡底于耉
어찌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단 말인가 / 靡㣧厥後
하늘도 믿기 어렵도다 / 天難諶兮
아름다운 딸을 두고 / 有女之懿
착한 사위 맞았으니 / 有甥之美
이것으로 내 마음을 자위하네 / 慰我心兮
시는 깊은 지취있고 / 詩有旨未
문은 높은 풍치 있어 / 文有高致
나로 하여금 길이 음미하게 하도다 / 俾余長吟兮
일에 중정을 잡고 치우치지 아니하며 / 中而不倚
뭇 사람과 화합하되 편파함이 없이 / 群而不類
한결같이 정성으로 일관하였네 / 一以忱兮
생각하면 완연히 살아 있는 듯하나 / 念言宛爾
아, 다시 볼 길이 없구나 / 於乎已矣
슬프다. 빨리 달리는 이 세월이여 / 嗟歲月之駸駸兮

하였다.



▣ 솔내 -
▣ 김태서 - 대부님 이 명문은 김구용 선조님이 지으신 것 입니까?
▣ 김윤식 - 이달충 선생이 지었습니다. 급암집 등을 참조하세요.
▣ 김윤만 -
▣ 김태영 -
▣ 김항용 -
▣ 솔내 - 윗글중 홍복도감판관 김앙(金昻)은 김묘(金昴)의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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