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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최종준(崔宗峻)과 충렬공(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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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27 06:05 조회1,6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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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을 지낸 선조 日兢의 蔭補로 양온사 同正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隊正이 된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 牽龍을 거쳐서 散員에 배명되고 식목綠事를 겸하게 되니 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郎將 監察御使로 전임하여 우창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도 듣지 않으니 어떤 대상이 권신에게 가서 참소하되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봉공하지 못한다" 고 하자, 이때 마침 공이 이르르니 권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고 하니,



공이 대답하여 가로되

" 전 어사와 같이 봉공할려고 하면 나도 또한 능히 할 수 있으나 다만 나의 중요한 근본요강은 국고를 채우는 데 있을 뿐이요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는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고 하니



그 참소하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권신도 또한 부끄러워 안색이 변하였다. 그때 공은 令旨대로 이를 다하고 돌아가니 국고가 만적하게 되었다.



정미년(1247)에 공은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승진되었다. 그 때에 몽고병이 침공해 들어오니 공은 여러 성주에게 명령하여 "위도(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하라" 고 하였다. -----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최우와 문간공(휘 창), 상서공(휘 효인) 할아버지 관계에 관심을 갖던 차였는데 대부님 올리신 글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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