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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준, 최종자---최온---최문본 (04) : 최종준 조카 최평, 최영 조부 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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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30 16:57 조회1,9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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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譯 고려사 제9책 (1963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 1991 신서원 발행)



최평(崔坪)은 성질이 침착하고 속이 깊으며 말과 행동이 얌전하였다. 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시어사(侍御史)에 까지 올라 갔다가 권세 부리는 재상의 뜻에 거슬려서 외직으로 정원(定遠)부사로 나갔었다.

후에 형부 랑중으로 소환되었으며 여러 번 승직되어 추밀원 부사로 되었으나 伯父 최종준과의 친혐(親嫌)으로 인하여 성(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죽으니 나이 55세 이었고 아들은 없었다.





최옹(崔雍)의 자는 대화(大和)이고 그 전 이름은 기(夔)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동지(同志) 열 사람과 10년을 기한하고 글을 읽기로 약속하였는데 수년 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만 두고 갔으나 최옹 만은 공부에 힘써 10년간 배운 결과 그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학식이 해박한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관승(大官丞)으로 임명되었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전리(典理) 좌랑으로 되었다.

충렬왕이 왕의 태손(太孫)으로 있을 때부터 스승으로 선임되었더니 즉위하게 된 후에도 왕이 학문에 뜻을 두어 그를 불러 국자 사업 으로 임명하고 날마다 그와 함께 통감을 토론하고 하였다. 국학 전주, 세자궁 령 등의 여러 관직을 력임하면서 특별한 왕의 총애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흰 막이 덮였으므로 끝내 전고(典誥) 직은 받지 못하였다.

18년(1292년)에 부 지밀직사사 문한학사 로 승진되었다가 치사한 후 죽었다. 최옹은 성질이 재치 있고 음률을 애호하였다. 학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었는데 제자 중에는 고관 대작과 귀족 출신이 많고 빈한한 집 자제들은 적었다.

당시 김보의(金保宜)란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사실인즉 최옹이 차작하여 주어 급제(합격)시킨 자이었으므로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다. 아들은 최원중(崔元中), 최원직(崔元直)인 바 최원직의 아들 최영(瑩)은 따로 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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