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寓庵集(우암집) 국역화 30--- 한강변 동호, 남호, 서호,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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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6-02 01:49 조회2,446회 댓글0건본문
● 압구정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 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년(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동호(東湖)
동호는 현 성동구 옥수동 강안인 즉 두모포라 불리던 지역으로 당시 도성을 중심으로 용산강을 남호(南湖), 마포강을 서호(西湖)라 불렀듯이 도성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이 곳을 동호라 불렀으나 실제는 두모포가 더 알려진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두뭇개’라 하였는데 한강의 본류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이 합쳐 흐른다 하여 ‘두멧게’ ‘두물개’ 등으로도 불렀으며, 이 말을 한자로 표현해서 ‘두모포’라 하였다고 한다.[註]
조선시대에는 이 두모포에 역대에 걸쳐 누정도 들어섰고 이에 따라 잔치도 베풀어졌다. 세종 1년(1419)에 이종무(李從茂) 등이 대마도로 출정할 때 태종과 세종이 친히 이 두모포 백사장에 나와 출정하는 이들을 전송하였고 또 며칠 뒤에는 한강정 북쪽까지 거동하여 당시 삼도통제사였던 유정현(柳廷顯)을 전송한 것은 유명한 사실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1466∼1525)은 이 곳에 유하정(流霞亭)을 짓고 사죽관(絲竹管)을 연주하고 성악을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으며 그 뒤 유하정은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되었다가 정조 때 규장각에 하사되어 각신(閣臣)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연산군도 현 옥수동 북쪽 기슭 풍경이 확 트인 곳에 황화정(皇華亭)을 건립한 다음 유희의 장소로 이용하였는데 중종은 이 정자를 제안대군에게 하사한 바 있으며[註] 이 당시 김안로(1481∼1537)는 이 곳에 보락당(保樂堂)이라는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사치생활을 일삼아 세인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으며, 중종 10년(1515)에는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을 가려 독서당을 설치하고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동호에 위치한다 해서 호당(湖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조 때의 문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은 만년에 이 곳에 몽뢰정(夢賚亭)을 짓고 세월을 보냈으며, 역시 선조 연간(年間)의 시인이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동호즉사(東湖卽事)’라는 제하에서 당시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좋을시고 강변엔 곳곳에 누대,
오며가며 그 사이로 나홀로 거닐었지.
당시엔 천금의 비용도 아깝지 않은 것을,
해마다 풍월이 조각배에 찾아드니.[註]」
그 뒤 영 · 정조대에는 많은 문신들이 앞서 말한 유하정을 중심으로 수시로 유상하였다. 순조 때는 석애(石崖)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이 쌍호정(雙虎亭)을 지었으며 정권을 장악한 바도 있는 조대비[익종비(翼宗妃)]의 탄생지로서, 조대비가 이 곳에서 출생할 때 두 마리의 호랑이가 이 앞에 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註]
동호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금 한남동과 보광동 사이로 뻗어 나간 남산 등성이에 제천정이 있었다. 이 정자는 선초부터 있어온 정자로서 가까이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장류를 바라보고 강 저편에는 관악과 또 남한산 등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어 명소로 꼽혔다. 성종조의 문신이었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은 한도십영(漢都十詠) 중 ‘제천완월(濟天翫月)’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서늘한 밤 강은 텅 비어 모두가 고요한데,
가는 발 반만 걷고 흰 달빛 맞이하네.
자색 연기 흩어져도 창공은 광활하고,
둥근 달 반쯤 나오니 황금으로 빚은 떡 같구나.
허하고 밝은 이 마음도 함께 맑고 깨끗하니,
밤 늦도록 학 곁에서 백발을 흩날리네.
강 다락 어느 곳에서 쇠피리 들려오나,
맑은 흥 멀리멀리 강 가득히 퍼져가네.[註]」
이 제천정은 당시 국내의 문신은 물론 중국 사신이 오면 으레껏 유연을 베푼 곳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많은 문사들이 창화시(唱和詩)를 남기고 있으나 아쉽게도 이괄의 난 때 훼손되고 말았다.
이 제천정 건너편에는 세조 때의 권신이었던 한명회(1415∼1487)의 압구정(狎鷗亭)이 있다. 이 누정은 한명회(韓明澮)가 모든 세상 일을 잊고 갈매기처럼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으나 그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세조를 등극시킨 당대의 모사로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압구정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고종조의 문신 어당(緬堂) 이상수(李象秀, 1820∼1882)는 압구정에 올라 감회어린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황량한 언덕에 말을 메고 홀로 배회하는데,
상당부원군의 이름난 정자 풀 속에 들어 있네.
동쪽 산기슭의 물은 이 곳으로 모여들고,
저 멀리 산봉우리는 한양을 둘러쌌네.
지금도 강변엔 갈매기 날아들고,
두견새(蜀魂)의 슬픈 울음 옛날과 같은 것을.
연파에 날 저무니 모두가 쓸쓸한데,
육신 사당 바라보며 끝없는 생각에 잠기네.[註]」
그 뒤 압구정은 금릉위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어 개화파 인사들의 회담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고종 21년(1894) 갑신정변 때 박영효가 반역으로 지목되자 정자는 폐훼되고 이 뒤부터 압구정(狎鷗亭)이란 이름만이 동명으로 남게 되었다.
압구정 맞은편 즉 현 한남동 459번지에는 성종조의 문신이었던 서석(瑞石)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지은 천일정(天一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천일이란 이름은 당나라 문인 왕발(王勃)의 ‘등왕각서문(冀王閣序文)’ 중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산 연맥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여 강 남북의 원근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명소였던 것이다. 그 뒤 이 정자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소유가 되었다가 고종조에 하정(荷庭)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어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이 누정을 찾았으며 청나라 서도(書道)의 대가였던 옹방망(翁方網)의 아들인 옹동화(翁同暎)가 천일정 현판을 썼으며 또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쓴 청원당 현판이 6·25전쟁 전까지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註]
●두모포(豆毛浦)
현재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던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5리쯤에 있었던 작은 나루로서 한강나루의 보조나루였다. 일명 두뭇개, 동호(東湖)라고도 하였다.
일화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 두모포에 사는 어부가 바다에 사는 큰 물고기를 나룻가에서 잡았는데, 그 크기가 나룻배만 하였다. 바다 물고기가 멀리 강줄기를 찾아오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를 보고 당시 사람들은 권세를 부리던 윤원형(尹元衡)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또한 두모포나루까지는 수량이 풍부했음을 말해준다.
선박의 강변에의 접안이 용이하여 일찍부터 사사로이 나룻배가 운행되어 강 건너 강남구 압구정동 방면으로 행인을 건네 주었다고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곳을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한 나루터로 이용하고 있다. 즉 경상도 · 강원도 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는 세곡선(稅穀船)을 두모포에 집결시키고 있다.[註] 그러나 곧 용산포로 이설되었지만, 두모포는 그 후 이 곳에 빙고(氷庫)가 설치되면서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집결되기도 하였다.
두모포 부근의 지형은 뒤에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한강물이 호수처럼 흘러 일찍부터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져 조선 초기에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유하정(流霞亭), 연산군(燕山君)이 황화정(皇華亭), 김안로(金安老)가 보락당(保樂堂)을 이 곳에 짓고서 절경(絶景)을 즐겼다. 중종 때에는 이 곳에 독서당을 지어 젊은 선비들로 하여금 연구에 힘쓰게 한 바도 있었다.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澮)는 두모포 강 건너 돌출 부분에 압구정을 지어 놓고 강가에서 갈매기와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였다는데 여기에서 오늘의 압구정동의 명칭이 유래한다.
오늘에는 이 나루에 나루의 옛 이름을 딴 동호대교가 가설되어 전동차와 승용차가 오가게 되었으나 나룻배는 간 곳이 없다.
●독서당지(讀書堂址)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 고개’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고개 밑에 독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수동의 청정가려(淸淨佳麗)한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 전기부터 산수풍경을 좋아하는 많은 문인 묵객들이 누정을 짓고 여가를 즐겼다. 특히 학문 연구를 조장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젊은 학자들을 이 곳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두뭇개 남안에 독서당을 지어 200여 년 간 존속되었다.
독서당이 있던 곳은 옥수동 244번지 동쪽인데 독서당이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府君堂)이 세워져 그 앞에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孔夫子道統古今淵源記念碑)’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으나 현재는 대신 주택이 들어섰다. 즉 응봉산 아래 정남향 언덕 위인 월송암(月松庵) 서쪽이 독서당 위치이다.
원래 독서당은 세종 8년(1426) 집현전 학자들에게 창의문 밖에 있는 장의사(藏義寺)를 하사하여 그들에게 휴가를 줘 사가독서하도록 한 것이 그 효시였다. 그러나 독서당 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은 성종 23년(1492)에 독서 면학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인가가 한적한 용산 청암동에 있는 절을 수리하여 마련하면서부터 였다.
「절간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 언덕에 있었는데 옛날부터 16나한의 영험이 있다고 하여 불공(香火)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 승(僧)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하고 속인(俗人)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기며 그 절을 홍문관에 주어서 학자들이 번갈아 가며 글을 읽게 하고 그 집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위의 글로 보아 용산의 절을 독서당으로 개편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산 독서당은 12년이 지난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로 성균관 · 원각사와 함께 폐쇄되었으나 중종반정을 계기로 학문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여 홍문관의 재개와 사가독서의 제도가 중종 5년(1510)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 때 독서당을 용산의 옛 건물을 개수하여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폭군 연산군의 잔재라 하여 폐기되고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남루(南樓)와 침방(寢房)을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대제학 유근(柳根)의 요청으로 독서당이 다시 설치되었다.[註]
독서당은 옥당(집현전, 홍문관) 못지 않게 평가되었던 것으로 중종 때는 고시(考試)하는 법이 대단히 엄격하여 만약 계속하여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다. 독서당원에 대한 예우는 지극하였는데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여 사무자가 9명, 용인(傭人) 8명이 배치되었으며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물자 공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사(賞賜)로서 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성종 · 중종 · 명종 등 여러 왕들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 주고 성종은 수정배(水精杯)까지 하사하였다.
독서당은 숙종 35년(1709) 이후에 폐지되어 존속되지 못하였으나 영조 때에도 호당이란 이름을 우수한 문신에게 붙여 주었으므로 사가독서의 제도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 때의 규장각을 개편한 것도 호당제도를 계승하려는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독서당원의 수효는 한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세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350년 간에 320명이 선발되었다.[註]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대단히 엄하였고 국가의 권장과 큰 관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당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호당의 권위는 상당하였다.
●용산강(龍山江, 南湖)
용산강은 일명 남호로서 용산 앞을 흐르는 한강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왕산 줄기가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을 이루고 다시 효창공원의 아담한 등성이를 만든 다음 나지막한 언덕이 여러 번 구부러져 노량진과 동작진의 강류를 감싸 돌아서 용산강 연안 곳곳에 승경을 이루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용산의 8경으로서 청계조운(淸溪朝雲), 관악만하(冠岳晩霞), 만천해화(蔓川蟹火), 동작귀범(銅雀歸帆), 율도낙조(栗島落照), 흑석귀승(黑石歸僧), 노량행인(露梁行人), 사촌모경(沙村暮景) 등을 들고 있다.
일찍이 고려 충숙왕은 왕후인 조국공주(曹國公主)와 함께 이 곳 강 언덕에 행궁을 설치하고 3개월이나 유주한 바 있으며[註] 고려 명종조의 문인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는 ‘숙용산한언국서재(宿龍山韓彦國書齋)’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제비 꼬리처럼 갈라지는 두 강물 장엄하게 흐르는데,
아득히 보이는 세 봉우리의 산 자라 머리처럼 들고 있네.
다른 날 내가 지팡이를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찾아 흰 갈매기 벗하리.[註]」
원래는 한강의 원줄기는 남쪽 언덕으로 흘러 내리고 또 한 줄기는 북쪽 언덕으로 흐르다가 서쪽의 염창사안(鹽倉沙岸)이 막혀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10리 정도의 긴 호수가 되어 연꽃이 피었다. 고려조에는 어가가 이 곳에 연꽃을 완상(玩賞)하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으나 조선조에 접어든 뒤 염창사안이 갑자기 조수에 밀려 파괴되어 호수가 용산까지 들어오게 되자 8도의 조운선이 이 곳에 정박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포 등 강촌까지 조선(漕船)이 모여들었다.[註] 그러나 강안의 산록은 사민(士民)들의 유상(遊賞)의 장소가 되었으며, 성종 12년(1482)에는 폐사를 수리한 뒤 독서당을 설치하여 여러 문사들의 독서하는 곳이 되어 남호의 수려했던 풍치가 그런대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현 서빙고동 사무소 근처에 있었던 창회정(蒼檜亭)은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훈신이었던 권람(權擥)과 밀의(密議)하던 곳으로 유명하였으나[註] 지금은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으며 헌종조의 재상이었던 사영(思穎) 남공철(南公轍, 1760∼1870)은 이 용산 강변에 작은 서재를 짓고 만년 휴양처로 계획한 바 있으며, 고종초에 영의정이었던 심암 조두순(趙斗淳, 1796∼1870) 현 원효로 4가인 한강 기슭 언덕에 심원정(心遠亭)을 지었는데 당시 많은 고관과 명사들이 이 곳을 찾아 강의 정경을 바라보며 상영(觴詠)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 터에는 약 600년으로 추정되는 백송이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 ?font face="서울세명조2">廊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심원정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함벽정(涵碧亭)이 있어 조선후기의 명사들이 자주 찾아 들어 풍월을 읊었으며, 그 뒤 을사오적신으로 꼽힌 이지용(李址鎔)이 이 용산강 근방에 용산강정(龍山江亭)이라는 누정을 건립하였으나 광무 11년(1907) 고종 즉위 때 당시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소실되었다.[註]
이렇게 낭만이 깃들던 강변의 풍경은 병자조약(1876)이 체결된 뒤부터 일본인을 위시하여 각국인의 거류지로 변해감에 따라 개시장(開市場)이 되어 근방 일대는 외국 상인들의 경쟁장이 되었다.
그 뒤 1921년에는 최초로 골프장이 이 곳에 만들어졌고, 1924년에는 효창원 묘소 동북쪽 지역이 공원으로 설정되었으며 1929년에는 원묘 지역을 합하여 공원을 확장하여 현대적 공원으로 설정됨에 따라 용산 강변의 그윽한 풍치 중 일면은 남게 되었다.
●마포(麻浦)
용산강 하류에 있는 마포는 남으로는 용산의 높은 언덕이 강변 가까이까지 우뚝 솟아 있고 북으로는 잠두봉(蠶頭峯, 절두산)의 석벽이 양화도 위로 솟아 나온 그 사이에 위치하는데 강폭이 광활하여 강류가 완만하게 흐른다. 또 현재는 없어졌지만 율도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한 폭의 그림처럼 강상(江上)의 풍경이 정겨웠던 것이다. 일찍이 ‘마포팔경’이라 하여 ‘용호제월(龍湖霽月), 마포귀범(麻浦歸帆), 방학어화(放鶴漁火), 율도명사(栗島明沙), 농암모연(籠岩暮烟), 우산목적(牛山牧笛), 양진낙조(楊津落照), 관악청람(冠岳晴嵐)’으로서 마포 원근의 풍경을 소묘하고 있으며 또 ‘한양십영’ 중에도 ‘마포범주(麻浦泛舟)’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강상에서 뱃놀이 하는 당시 사민들의 한가로운 정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많은 풍류 묵객들이 이 곳을 찾아 누정을 짓고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즉 풍류객으로 유명했던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은 만년에 이 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세우고 경치를 즐겼으며, 또 현 망원동에는 세종의 형인 효녕대군이 언덕 위에 망원정을 짓고 소유자적 하였는데 세종이 이 곳 정자에 올라 방포기사(放砲騎射)하는 것을 보고 주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때에 마침 비가 알맞게 내리자 세종은 이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으로 명하고 당시 부제학(副提學) 신색(申穡)에게 희우정의 세 글자를 써서 벽에 걸게 했으며 변계량(卞季良)에게는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그 뒤부터 희우정은 명나라 사신 등 국제 빈객의 연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뒤에 이 누정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어 별장으로 쓰여졌는데 성종도 해마다 이 곳에 나와 농황(農況)과 수전(水戰) 연습을 둘러보곤 하였다. 성종 16년(1485)에 이 누정을 크게 개수한 다음 망원정으로 개명하고 어제시를 비롯 여러 문신들이 시를 각판하여 벽상에 걸었다.
또 세종의 3자인 안평대군도 이 곳에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장서 만여 권을 구비한 다음 당대 명사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시화금기를 즐겼으며 밤이면 강상에 배를 띄우고 시주로서 강상풍월(江上風月)을 읊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담담정은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었다고 한다.[註]
마포강의 하류인 서강은 일명 서호로서, 조선시대에는 황해 · 전라 · 충청 · 경기의 조운이 이 곳에 집결하여 정도전의 ‘신도팔경(新都八景)’ 중에 ‘서강조박(西江漕泊)’을 꼽았으며 영조 때 문신이었던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은 ‘서호십경(西湖十景)’으로서 백석조조(白石早潮), 청계석람(靑谿夕嵐), 속서우경(粟嶼雨耕), 마포운범(麻浦雲帆), 조주연류(鳥洲烟柳), 학정명사(鶴汀鳴沙), 선봉범월(仙峰泛月), 농암관창(籠岩觀漲), 노량어조(露梁漁釣), 우잠채초(牛岑採樵)를 꼽고 있다.
숙종 때 문신이었던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피하기 위해 이 곳 서호 현석촌(玄石村)에 집을 마련한 다음 그 소감을 이렇게 읊고 있다.
「십년 간 서호 계획 이제야 이루어지니,
한 구역 연월이야 누구와 상대해서 다투겠는가.
강물이 흑석포에 닿으니 호수소리 웅장하고,
산은 청계와 이어지니 저녁노을 잔잔하네.
진세를 버린다 해서 세속의 누(累) 풀지 못할 것을, 봄이 오면 전포에 나가 밭갈이나 해야지.
창 앞은 종남산(終南山)과 마주 대하나,
마음속 바라는 건 나라근심 옛 같은 것을.[註]」
박세채가 복거하던 이 현석촌에는 전부터 정씨가의 창랑정(滄浪亭)이 있었는데 효종의 부마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1652∼1747, 숙녕옹주의 부군)이 새로 사서 이 정자를 중건한 바 있다.[註]
또 흥선대원군은 현 염리동에 99칸 정도 되는 별장으로 아소정(我笑亭)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야 후 이 곳에서 소일하다가 광무 3년(1899)에 하세(下世)하자 이 누정 울 안에 산 소를 들여 한때는 이 일대를 국태공원이라 불렀는데 순종 원년(1907)에 파주로 이장한 뒤 건물을 헐어서 봉원사로 가져 가서 큰 방을 지었다고 한다.[註]
이 밖에도 이 일대에는 청운정(淸雲亭)을 비롯해서 탁영정(濯纓亭) · 소파정(笑坡亭) 등 많은 누정이 강변의 수양버들 사이사이로 들어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고 또 당대의 명사들이 이 곳을 찾아와 진세의 괴로움을 한때나마 잊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절두산과 양화도도 풍류 묵객들이 자주 찾아 들어 명소로 이름 있었다.
●조강도(祖江渡)
일찍이 고려 때부터 개설되어 있었으나 사람들의 왕래는 그리 빈번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에는 나루에서의 잦은 사고와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염려하여 나루의 개설을 꺼려 하였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하였다. 사도선(私渡船)이 있어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민간인을 건네 주었으나 이용도가 높지 않았다. 통진현감은 이 곳에서 도성으로 수송되는 세곡선을 안전하게 호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부근의 수로가 자못 위험하였다.
▣ 김항용 -
▣ 김윤만 -
▣ 김은회 -
▣ 김윤식 -
▣ 김주회 - 지난 일요일 5월 30일 한강시민공원 이촌지구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전원풍경 그윽한 강변길을 따라 동호대교 아래 東湖에서 한참을 놀다 왔습니다. 동호의 그윽한 경치는 일품이었으나 마음맞는 벗과 음주가무가 없어서 멋은 없었습니다.
▣ 김주회 - 다음 일요일 6월 6일에는 이촌지구에서 龍湖(용산 앞) 지나 西湖(서강대교 아래)까지 자전거를 타고 돌아볼까 생각중입니다.
▣ 김용주 -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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