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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가 보는 안사연 여름캠프(9)-괴산군 사리면 보광산의 김소 묘소와 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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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07-02 00:23 조회1,9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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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金 素) 1602(선조25)∼1666(현종7)

  字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양덕공(諱 時說)의 장자.   

  1630년(인조8.29세) 진사급제. 무사참봉(巫仕參奉-종9품),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호조좌랑(戶曹左郞-정6품)이 되었다..

  1635년(인조13,34세) 알성문과 급제.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됨. 그 해(1636년,35세) 후금(청나라)의 전란이 예상되매 공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한 자로서 선발되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637(인조15.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모시고 가기도 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22)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중국에 새해 인사로 가던 사신)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려 공금을 아껴 남은 돈으로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한다.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 잠깐 있다가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 26,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었다.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에 몰. 수(壽) 65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頂 계좌(癸坐)이다.

  유물 : 白牌(진사급제)1매, 紅牌(문과급제)1매, 諭旨(충청도 관찰사, 충청수사) 2매.

<주요 자료 소개>

1.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묘소  (2003. 9. 11.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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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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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동편의 문관석과 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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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癸坐丁向이란 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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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자석(좌) 전면과 두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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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 뒷면-朝鮮 觀察使 安東金素 貞夫人 光州金氏之墓 床石-이란 글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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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원경-우측:감사공(휘 소),  좌측:승지공(휘 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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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에서 바라 본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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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쪽에서 묘소를 향해 바라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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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앞에 가득 피어 있는 야생화 꽃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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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모습> (당시엔 작은 법당이 있었음)

 

  2)진사(進士) 급제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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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진사급제>

 

  3)문과 급제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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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문과 급제>             

  4)충청도 관찰사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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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충청도 관찰사>  

 

  5)충청도 관찰사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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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사 不忘碑>-1649년(인조 27년) 경에 충남 공주군 공주 공산성에 세웠던 것인데 훼손 분실됨. 이에 1992년 안동김씨 공주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문중 역대 선조 4위 관찰사 불망비를 세움. 우로부터-金悌甲, 金億齡, 金時獻, 金素

 

2.  <친필 자료>

   1)친필 서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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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필 서찰>(2002. 10. 16. <근묵>(성균관대 박물관 간. 1981. 636p)에서. (2002. 10. 16. 항용(제) 발견 제공)

 <해독 원문 및 번역문>(익수(제) 번역, 제공)

 阻餘承問    從而審起居    慰仰 大旱之餘    暴雨驟注    前頭民事無復可言者    雨後風亂    閉호(집호)方睡   意外   情札適到此際    慰轄倍常  可當相對路傍    雖劇恩及久矣    中不顧事勢    卽往赴任宜也    細量筋力    萬艱支堪如何    頃者奴子往原營回來    見方書卽    初六日發向春川    巡歷而西     來三月入金剛爲計    今雖作書    無處可傳    餘對客不備    伏惟下照    拜謝上狀

 甲二旬七 庚末 素

 격조하던 나머지 위문을 받았소.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기거를 살펴주고 있으니 위안이 되길 바라오.

 크게 가문 뒤에 폭우가 퍼부어 지난번 백성들의 농사는 더 말 할 나위가 없소. 비가 내린 다음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창문을 닫고 곧 잠이 들었는데, 뜻밖에 반가운 편지가 이런 때에 마침 도착하여 더욱 크게 위로가 되니, 길가에서 서로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였소.

 비록 큰 은혜가 오래 미치기는 하겠지만, 그런 가운데 형편을 돌아보지 말고 곧장 가서 부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근력을 잘 헤아려서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이 어떠하오.

 지난번 가노(家奴)인 <奴子>가 원주 영(營)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방(方. 주-또는 万)의 편지를 본 즉 초 6일에 춘천 쪽으로 떠나 순력하고 서쪽으로 가서, 오는 3월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갈 계획이라 했더군요. 이제 비록 편지를 쓴다 해도 전할 길이 없소.

 손님을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갖추지 못하오. 삼가 살펴보시오.     고마움에 절하며 글월 올리오.        갑월 27일    서쪽 끝에서  소(素)가

*주1-수신자 : 미상        *주2-작성연대 : 미상(1660년경으로 추정)

 

  2)친필 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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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필 서찰> (2002. 12. 16. 항용(제. 13대손) 경매 물건. 당일 매입 소장. 제공)

 * <아트서울> 경매 공고 내용
번 호 :ks-101   성 명:양졸와 김소(養拙窩 金素 1602-1666)   품 명:김소 간찰(簡札)   년도:1648 (戊子).  크 기:34x26.5cm  가 격:390,000원 홈페이지:http://www.artseoul.net

<해독 원문 및 해석문>(익수(제) 번역 제공)

卽爽夜來   兄調攝中起居如何 頃日之進非不會以日暮爲限 其時暫看厭外會與兄 從頌者拘於弟之久坐   不無落莫焉 不得已强情起來   兄可想他人之有下耶   山茱萸有無不可不知   設或有儲想此農時   使喚不一助   近來不易散影色    人幸示望白如何    拙句不可謂言志    只陳所懷耳        伏惟   兄照謹拜     上狀    戊子至月念一  弟 素頓

  밤새 좀 상쾌해졌습니다. 형은 몸조리 중에 어찌 지내십니까. 지난번 찾아뵈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기한이 되었기에 만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잠깐 보면서 형과 함께 바깥 모임을 실컷 보았지요. 칭송하는 자를 쫓아 제(弟)가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음을 꺼리는 것에 낙담함이 컸을  것입니다. 부득이 억지 심정으로 일어났습니다. 형은 아마 다른 사람들이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산수유(술)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런 농사철을 생각하면 불러 본들 하나도 도움이 안됐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산 그림자 빛도 쉽게 흩어지지 않아, 사람들은 다행히 보름달이 얼마나 하얀지 보게 되었습니다. 졸구(拙句)라서 뜻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다만 마음속에 품은 바를 표현했을 뿐입니다.

 삼가 형께서 살펴보소서. 삼가 절하며 글월 올리나이다.     무자(戊子. 1648. 공이 충청도 관찰사 때) 동짓달 21일     제(弟) 소(素) 돈수

6. <감사공 묘소 아래에 있는 봉학사지 오층석탑 및 보광사 소개> (2003. 9. 10.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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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보광사 뒷편에 있는 봉학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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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판 해설 내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9호.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이 탑은 보광사 뒷편의 옛 절터에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매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가 없어진 채 탑 몸돌 부분이 올라가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초층을 제외하고 2층부터는 탑 몸돌과 지붕 돌이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체감비율이 약해서 경쾌한 맛이 없다. 1966년 2층 지붕돌의 사리공에서 청동사리함과 청동불상이 발견되었는데 불상에서 <봉학산 봉학사>라는 시주문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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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9. 11. 촬영 당시 4층 몸돌에 땅벌집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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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층석탑 옆에 있는 연화 등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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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서기지본(墨書記紙本)>

1. 발견시기:1967.  6.    2. 장소 :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 속   3. 발견자 : 禹英奎(사리면 거주자)         4. 크기:22.7cm(가로), 12cm(세로)   5. 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등록번호-국립박물관 신1819번).   6.사진 입수경위 : 1987. 9. 30. 후배(안병찬. 당시 국립박물관 근무)로부터.  7.기록 내용 : "--支那六月 二十二日---大施主 孝宗妻子奇德" :  효종은 중국 송나라때의 왕으로 이 탑의 건립연대는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 19) 사이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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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小像)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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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小像) 후면>

 1. 발견시기:1967.  6.        2. 장소 : 2층 옥개석의 원형 사리공(舍利孔. 지름 11cm) 속에서 3구의 소상과 묵서기지본(墨書記紙本)이 들어 있는 청동제 방형감(靑銅製 方形龕)이 발견됨.      3. 발견자 : 禹英奎(사리면 거주자. 박물관에 신고)        4. 크기:4.1cm(길이), 2.2cm(높이), 1.5cm(두께)       5. 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등록번호-국립박물관 신1819번).       6.사진 입수경위 : 1987. 9. 30. 후배(안병찬. 당시 국립박물관 근무)로부터.        7.제작연대 : 1163년(고려 의종 17)--1189(고려 명종 19) 사이로 본다.

 

                      <보광사 소개> (2003. 9. 10.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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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 (1941년 건립. 태고종. 1988. 개축한 모습. 주지-익원공파 金泰國. 2000년 부임. 043)833-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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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1983년 항용 촬영. 붉은 기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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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에 모셔져 있는 석조여래 좌상> (본래 봉학사에 있던 불상. 2001. 1. 1. 항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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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내에 있는 불상 안내판>

   *기록 내용

   <괴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槐山鳳鶴寺址 石造如來坐像)>

     충청북도 사리면 사담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이 불상은 불두(佛頭)와 왼 팔목 등을 보수하였으나 보수부분을 제외하면 잘 보존되어 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으로 높이 95Cm이며, 신체에 비하여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다. 굴곡이 거의 없는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 같은 삼도(三道) 표현, 평면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형식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세부 수법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산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35년부터 보광사 대웅전에 봉안하여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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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신각> (경내 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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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내의 신축 精舍> (2002. 10.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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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뒤의 암벽에 새겨진 글-鳳鶴山>                      <법당 앞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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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내에 있는 옛 연화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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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우측에 있는 안동김공 휘 현(炫) 묘소>

 

   <감사공 생가 거주지 조사> (2003. 9. 25. 항용(제) 제공)

 1. 조사, 발견 일시 : 1987. 7. 27.      2. 조사자 : 김항용(제).       3. 장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구 105번지 (현 정원사 절 일대)

 4. 고증 자료 : <괴산군지>(1990. 9. 30. 괴산군지 편찬 위원회. 1055P)--"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출생 "

 5. 현지 고증인 : 孫錫福(사담 2구 103번지 거주. 당시 9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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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의 마을비 및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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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비>

 1. 건립일시 : 1993. 11.

 2. 내용 : 마을 이름을 하도(荷島)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형상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와 섬(島)자를 인용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 앞은 옛날 한양(漢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국사당(國士堂)이 있었고 큰 시장이 열리던 매우 번창한 곳이었다.

 옛부터 학문을 숭상하여 마을에서 담을 세우고 배움에 힘써온 바 조선 현종조에 비인(庇仁)현감 손우(孫愚)공 흥해군수 손지(孫志)공 제주목사 손유(孫愈)공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공 등을 배출하였다.

 갈잎을 뜯어다 종이 대용으로 글씨를 쓰며 글을 익혔다고 하니 그 당시의 향학열을 가히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에도 향학의 뜻으 ㄴ이어져 일제치하에서도 우종국(禹鍾國)공 등이 주축이 되어 마을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써왔다. 지금 우리 마을 출신 인사들이 경향각지 각 분야 요소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도 이렇듯 끊이지 아니한 향학열로 후진을 양성한 것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와같은 선인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더욱 복된 마을을 만들어 가자는 다짐으로 이 비를 세운다.

         1993년 11월   일.   하도마을 주민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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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공 생가 유물인 주춧돌>(현재 사담 2구의 손목삼, 손근영씨 집 사이의 담장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데 현재 약 9개 정도가 남아 있다. 한 개 당 30Cm(가로), 30Cm(세로), 65Cm(높이)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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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절(정원사-태고종,주지승 고진수)이고 일부는 상기 밭 자리. 사리면 사담리 2구 105번지 일대). 가로(80m), 세로(30m)>

 




▣ 김우회 - 긴 장문 잘보았습니만, 참 고생이 많았구나함을 느끼는 산사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도 - 늘 노고에 감사드림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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