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섭(의금부도사)합장묘지명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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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7-02 00:32 조회1,489회 댓글0건본문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 병서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
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
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
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졌다. 이때에
동정(東征) 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擯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 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 한 신이 없을 것이다.” 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矱)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矱)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 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 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 찬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청파군
(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矱)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晬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
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상촌 신흠 찬
서기2004년 6월 일
김영환 옮김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
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곧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우회 - 번역본이라 더 정감이 가는군요, 젊은이들도 많이 보겠지요.
▣ 김태도 -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림니다.
▣ 김발용 - 대부님!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光烈 - 대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 김윤식 - 대부님 뒤늦게나마 감사 말씀 올립니다.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
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
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
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졌다. 이때에
동정(東征) 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擯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 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 한 신이 없을 것이다.” 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矱)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矱)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 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 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 찬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청파군
(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矱)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晬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
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상촌 신흠 찬
서기2004년 6월 일
김영환 옮김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
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곧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우회 - 번역본이라 더 정감이 가는군요, 젊은이들도 많이 보겠지요.
▣ 김태도 -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림니다.
▣ 김발용 - 대부님!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光烈 - 대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 김윤식 - 대부님 뒤늦게나마 감사 말씀 올립니다.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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