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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과 李承休 09 ---만년에 불교에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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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05 23:16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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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휴(李承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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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만년에는 불교에 몰입하여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기도 하였다.







■ 동안거사 雜著 一部

成均直講 지제교 李衍宗(=이승휴 아들) 編

家君(=이승휴)께서 평소에 著述한 四六 雜文은 서울(=개성)을 떠나 고향(=삼척)으로 갈 즈음에 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었다. 晩年에 지은 약간 편을 엮어서 雜著 一部로 삼는다.



● 看藏寺記간장사기

간장사란 옛날 容安堂용안당이요, 용안당이란 동안거사가 장차 海藏해장을 열람하려고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이 보광정기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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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박한 자질로서 이렇게 오래도록 한가함을 얻게 되어, 궁궐의 淸嚴52)청엄을 울며 하직하고, 碧山벽산의 궁벽한 곳에 붙여 살게 되었구나. 이웃에 절53) 하나가 있으니, 불경이 천 상자나 있었다.

옛날 매우 바쁜 일에 얽매였을 적에는 마음에 있어도 시간을 낼 수 없었는데, 지금 산림에 있어 일이 없으니, 마땅히 내가 시기가 왔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 것도 달갑게 여기나니, 寸陰촌음을 한자의 구슬처럼 보배롭게 여겨야겠다. 그래서 마치 좋고 묘함과 근원을 찾기 어려운 말을 눈으로 대하고서, 대롱으로 엿보는 격이고 아득하고 한량없는 푸른 바다를 마음에 두고서 작은 소견으로서 헤아리고자 함과 같았다. 六時육시로 책상을 대하고 한결같이 향을 피웠다. 庚辰年경진년(1280) 10월에서 己丑年기축년(1289)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다 보기는 했으나, 지식이 얕고 根機근기가 미약하여 비록 임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는 못했어도, 日就月將일취월장이 되었으니 어찌 섭렵의 좋은 인연이 아니겠는가. 책은 깨끗하고 창은 밝으니 기쁨이 깊고 맛도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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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甲午年갑오년(1294) 봄에 이 동구에서 나왔다. 廣川광천 아래 二水이수 사이에 약간의 버려진 공한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安集使65)안집사에게 허가를 받아서 또 간장사에 바치니, 전후 합한 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7.8結66)결이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常住상주하면서 齋재를 올리고 공양하는 밑천으로 삼았다. 上朝67)상조의 皇帝황제의 御位어위는 萬年만년을 누리시고 本國본국 주상폐하와 왕비, 세자가 각각 千秋천추토록 보존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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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人후인들이 연유를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에 그 사실을 쓴다.

至元지원 31년(1294) 갑오 시월 일







■ 이승휴의 [동안거사집] 연구 (2000, 강원대 최진복 석사논문)



이승휴는 철저히 儒敎的인 敎理를 體得하여 儒者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佛書를 친근히 하여 헛되이 날을 버리지 마라” 하고 하여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충렬왕6년(1280) 나이 57세에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충렬왕의 失政과 부원 勢力家들의 횡포를 비판한 10事를 上疏했다가, 파직되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온 후 인근 寺刹에서 佛書를 빌려다가 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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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敎宗에 의해 뒷받침된 이후, 고려불교의 하나의 특징인 居士佛敎가 유행하였으며 이승휴의 불교세계도 결국은 자신의 滿足에 安住했던 거사불교의 성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고 하여 그의 사상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10)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이승휴의 불교사상은 居士佛敎的인 성격이 짙다고 하겠다. 고려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敎宗에 의해 뒷받침된 이후, 고려불교의 하나의 특징인 居士佛敎가 유행하였다.

당시 고려 귀족사회는 불교가 일반화되어 있었고, 문인 관료에서부터 유학자까지 불교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에는 불교에 深醉한 나머지 在家佛子인 居士로서 일생을 보내거나, 아예 출가하여 불문에 歸依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의 禪宗도 敎宗도 아닌 성격을 보였는데, 대체로 禪을 통해 수행하고 불서를 읽으며 은거하였다.

이러한 거사불교는 대개 12세기 이후부터 발생하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이자현과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까지도 거사로 자칭할 만큼 크게 유행하였다.

이들 居士들은 대개 귀족의 일원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갖고 산중에 암자나 절을 지어서 寄居하고 불경을 읽으면서 마치 출가인과 다름없이 사는 불교에 深醉한 사람들이다. 세속에서 떨어져 은거하는 만큼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생들의 구제에 힘쓰는 출가승과는 달라서 자신의 신앙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개인적인 수행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특정한 경전에 耽溺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자신이 은거한 절을 짓고 땅을 희사하기도 하며, 때로는 불교에 深醉하여 실제로 출가해 버리기도 한다.62)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때 이승휴도 당시의 居士들처럼 문벌귀족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容安堂을 짓고 불경을 공부했는가 하면, 절에 布施를 바치고 田地를 희사하면서 자신의 修行에 몰두하였다는 데서 분명히 居士佛敎의 성격을 띄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승휴는 미진한 經文의 오묘한 이치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佛家에 正統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의뢰한다.



이승휴가 이같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것은 파직으로 인한 원인에도 기인하겠지만, 당시와 같은 시대상황 하에 있는 모든 지식인들의 공통된 학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휴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익히 체득한 儒敎的인 소양뿐만 아니라 佛敎的인 지식도 쌓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불가에 정통한 다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청하여 배우면서 식견을 넓혀가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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