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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진천 일송정(一松亭) 06---7세손 창신교위공(휘 孝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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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0 17:15 조회1,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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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손 孝曾(효증) ?1523~ ,



<족보> 字希參 彰信校尉 墓一松家後乾坐 配順天朴氏墓祔





1. 형제자매



부 휘圻(1493~1568)와 모 兵使 辛引宗의 따님 靈山辛氏와의 사이에 3남(▶孝曾효증, 孝俊효준, 孝騫효건) 3녀(朴元龜박원구, 李?이?, 洪滉홍황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弟 孝俊효준은 武科壯元하였다고 하나 무후하고



弟 孝騫효건은 1592년 왜군이 진천으로 들어오니 현감 洪趾는 內浦로 피난 도만하고 경내에는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執綱 즉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김효건은 진천현 안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山谷間 (지금의 태락리에서 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차단하고 복병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넘어오는 왜병을 급히 몰아치니 상당수의 적이 포살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뒤에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진천군지>





2. 배위와 자녀



字는 希參(희삼)이며, 彰信校尉(종5품)이었다. 순천박씨와의 사이에 2남(錘추, ▶鉉현) 1녀(趙士昌조사창에 출가)를 두었다. 墓는 일송정 묘역 최상에 있다.





3. 집안에 대대로 家傳되어 오기를



휘孝曾 할아버지의 손자되시는 휘廷佶 조상께서는 조부모님(=孝曾, 순천박씨)이 작고하시자 一松亭(당시 明信里)에 장례를 뫼시고, 이장 후 두해 지나 (서기 1600년경) 長管里에서 복잡하고 불편하시어 이곳 일송정으로 최초 개척하신 것이 마을의 창시이다. (최초 정착지는 현재의 건송리 517번지 在均 별장 자리로 당시 가시덤풀을 걷어내고 터를 잡았다고 함)

지명은 입구에 한 그루 소나무가 우뚝 서 있어 일송정이라 명명하고 한 그루 소나무가 너무 외롭게 느껴 우측에 槐木 1柱를 심어 좌측 괴목으로 양괴목정을 이루었으니 마을 입구의 장엄한 위용은 일송정의 상징이며 역사이다. <일송정 유래비, 1998, 在鴻 撰>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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