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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30---제주도에서 삼별초의 난 진압 (12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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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7 22:10 조회1,4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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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1273년 (원종14, 62세), 行瑩中軍兵馬元帥로 탐라도의 삼별초를 정벌한 공으로 門下侍中이 되시고, 元帝(원 세조 쿠빌라이)의 부름으로 元나라에 다녀오시기도 합니다. (★3차 入元)

이때에 둘째아들 김수<金綏--후에 김흔(金 )으로 개명>도 아버지 충렬공을 따라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있습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갔다.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은 이것을 심히 우려하여 14년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내었다. 김방경이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에 돌연히 거센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벌써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가 세차서 전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의 안녕함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 사업 하나에 달려 있는데 오늘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풍랑이 멎었으므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浦)로부터 진공해 들어갔다.


반적들은 바윗돌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뛰쳐 나오며 고함을 치면서 중군의 진격을 막았다. 김방경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면서 여러 배들이 동시에 진격하도록 독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입해 들어갔고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하였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이르러서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한편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가니 반적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몰려 자성(子城)에 밀리어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서 들어가 화시(火矢) 4발(發)을 놓으니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반적의 무리들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반적의 편에서 넘어와 투항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반적들이 이미 형세가 궁박해져서 달아날 것을 꾀하고 있으니 빨리 쳐서 점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옷을 벗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을 표시하면서 항복해 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탐라의 주민들은 모두 평안히 이전처럼 안심하고 살게 하였다.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유천우가 지은 충렬공의 탐라(제주도)에서의 삼별초 진압을 칭송하는 詩가 <동문선>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유천우(1209∼1276)는 상서 ★김창(金敞)에 의하여 ★최우(崔瑀)에게 추천되어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그의 문객이 되었던 사람으로,
1263년(원종4) 지어사대사이셨던 충렬공과 좌승선 유천우가 路上에서 다툼이 있었으나(유천우는 1264년에 지어사대사를 지냄), 1270∼1272년 충렬공께서 진도에서 삼별초를 진압할 때 전라도 무장 장사현에 있었던 유천우의 전장(농장)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훈계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습니다.

▣ 賀元帥金公方慶攻下耽羅(하원수김공방경공하탐라) ▣
--원수 김방경이 탐라를 쳐서 평정함을 축하하며--<兪千遇(유천우)>

北來萬馬不隨鞭(북래만마불수편)
북에서 온 일만 말이 채찍을 따르지 않고

南聚群尨欲吠天(남취군방욕폐천)
남쪽에 모인 삽살개 떼들이 하늘을 보고 짖으려 하네

馴旣難馴制難制(순기난순제난제)
길들이기 어려운 것들을 이미 길들였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들을 제어했나니

論功何止上凌煙(논공하지상능연)
공을 논할 양이면 어찌 능연각에 오를 뿐이랴

≪출전 :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 尨 - 삽살개방, 吠 - 짖을폐, 馴 - 길들일순
☞ 능연각 - 당나라 태종이 능연각에 공신들의 초상을 그렸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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