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31---1653년 탐라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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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7 22:13 조회1,610회 댓글0건본문
탐라지(耽羅志) 1...김방경
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에 선조님들에 대한 기록이 있어 소개합니다.
주요내용은 2002년 7월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펴낸 "역주탐라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탐라지 [耽羅志]
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1594~?)이 《동국여지승람》 및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참고하여 편찬한 제주도 제주목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의 읍지.
목판본. 1책. 1976년 제주교육위원회에서 편찬한 《탐라문헌집(耽羅文獻集)》에 번역되어 있다. 신찬(申纘)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제주현과 정의현으로 나누어 토지의 경계 및 도로 ·관원 ·성씨(姓氏) ·풍속 ·명승지 ·산천 ·교량 ·토산품 ·경작지의 면적 ·성곽 ·방호소(防護所) ·수전소(水戰所) ·봉화대 ·궁실 ·창고 ·학교 ·향약 ·사원 ·군병(軍兵) ·노비 ·과수원 ·인물 ·효자 ·열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속조에는 검소하고 예의바르며, 장수자가 많은 환경과 풍습을, 토산조에는 특산물인 귤과 맛이 좋지만 매우 희귀한 생어(生魚) 등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방호소는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 주요한 지점에 설치한 방어시설이며, 수전소는 해군기지와 그 시설물들을 기록한 것이다. 학교조에는 향교가 제주에는 동남성 안에 정의현에는 서성 안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후와 풍토, 사구(砂丘)의 형성과 이동 및 화산 폭발에 관한 기록 등은 관측의 세밀성과 정확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은 체재가 완정된 가장 오래된 읍지이다.
디지탈 한국학
이원진(李元鎭){1}
1594(선조 27)∼1665(현종 6)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판서 지완(志完)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執義) 등을 거쳐 1647년 승지에 올랐다.
1644년 교리로 있을 때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경흥·경원·온성 등지에 침입하여 횡포를 자행하던 여진인에 대하여 조정의 명으로 그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또, 1648년에는 왕명으로 별시문과에서 초시를 파하려 하자, 그 부당성을 강력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 때 동래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남만인(南蠻人)30여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현종초에는 병조참의·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탐라지 耽羅志》가 있다.
역주탐라지 p14
원종 11년(1270) 경오(庚午)에 반적(反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에 웅거하다가, 다음해 신미(辛未:원종 12년, 1271)에 <제주에>들어와서 웅거하며 침노하여 약탈하였다. 성주 고인조(高仁朝)와 왕자 문창우(文昌祐)등이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3년이 지난 계유(癸酉:원종 14년, 1272)에 왕이 김방경(金方慶)등에게 명하여 원(元)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역주탐라지 p46
고려 원종 11년(1270)에 삼별초가 진도에서 담라(耽羅)등에 들어 왔다. 안팎의 성의 험한 지세를 믿고 더욱 창궐하니 김방경은 몽고의 흔도(忻都)와 함께 차례로 주자섬(楸子島 )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한밤중에 바람이 급하게 불자 지시할 바를 몰랐다. 새벽녘에 이미 ‘담라’ 가까이에 도착하였다. 바람과 파도가 일고 용솟음쳐서 나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근거지를 잃어버리자,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단 한번에 달려있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습니까?” 고 하니, 순식간에 바람과 파도가 멈추고 잠잠해져서, 드디어 나아가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탐라 사람들은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한다.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산에는 나무가 무성하다. 봉우리에는 모두 샘이 있으며, 섬 사이에는 배를 감출만하다.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바람을 기다린다. 배가 머무르는 옛터가 있다. 또 분묘가 많이 있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고려 충정왕 2년(1350) 경인(庚寅)에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여 조공개 근처로 옮겨 살았다.
역주탐라지p173
항바두리성(缸坡城) :제주목 서쪽 25리에 있다. 성안에 샘이 있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였다.김통정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였다.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에 웅거하며 이성을 쌓아서 막았다. 김방경등이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千戶) 윤방보(尹邦寶)로 하여금 영병(領兵) 400과 관군 1천명을 거느려 유진(留鎭)케 하고 돌아왔다.
이원진의 시
暮投孤舘駐行 저물녘 객사에 머물러 깃발 꽂았네.
古戍蒼茫枳棘平 옛 수루에서 멀리 탱자나무 예사롭소.
都統餘威風捲海 최영의 남은 위풍, 바다를 제압하고
侍郞遺迹月臨城 김방경의 지나간 성곽엔 달이 비치오.
天底碣石陰霏合 하늘 끝 갈석산엔 눈비가 내리네.
地壓扶桑霽旭生 땅에선 부상을 눌러 해돋이로다.
八詠隱侯今不見 팔영시는 내가 아직 못 보았으나
碧紗籠下淚沾纓 분포등롱 불빛 아래 눈물이 갓끈에.
* 도통(都統)은 최영(崔瑩 : 1316~1388)을 이른다.
시랑(侍郞)은 김방경(金方慶 : 1212~1300)을 이른다.
팔영은 양나라 심약(沈約)의 시인 「팔영시(八詠詩)」를 이른다.
역주탐라지p173
최보(崔溥)의 35절(三十五絶) 중 13절
候風島口金方慶 후풍도 어귀에는 장군 김방경이요.
明月捕頭都統瑩 명월포 머리에는 도통 최영일세.
前後㫌旗盖海來 앞뒤로 개선의 깃발 바다를 덮었소
渠心厭亂知相應 적들도 난리에 피곤하여 서로 응했네.
* 전후정기(前後㫌旗)는 앞서 김방경 장군이 삼별초를 평정한일과 뒤에 최영 장군이 목호를 완전 궤멸시킨 것을 말함.
* 최보(崔溥)의 35절(三十五絶)은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또는 탐라사(耽羅詞)라고도한다. 최보가 1488년 1월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왔을 때 지었다.
* 위에서 살펴 본바에 의하면 당시(조선전기)의 충렬공 선조님에 대한 평가를 알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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