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32---일본 원정의 전진기지 濟州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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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7-27 22:16 조회1,553회 댓글0건본문
일본 원정의 전진기지 濟州道
진도에서 패전한 삼별초의 잔당은 해상으로 도피하여 耽羅(탐라: 제주도)에 들어갔다. 탐라는 1270년 11월 이후 삼별초의 판도였다. 그들은 현지 농민들의 협력을 얻어 제주도 북서부에 內·外城을 축조하고 북부의 해안을 따라 보루를 쌓아 麗蒙연합군의 내습에 대비했다.
제주도에 있는 抗蒙유적지는 최근 10년 사이에 두 번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답사에서 생략하기로 했다. 이곳을 방문해 보면 해안으로부터 약 3km쯤 들어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에 抗蒙유적지가 있는데, 주위 6km에 축조된 土城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에 들어간 삼별초 병사들은 金通精을 리더로 받들고 해상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전라남도·경상남도의 여러 항구를 습격하고, 일본 원정용으로 건조된 軍船들을 잇달아 불태워 고려정부를 공포에 빠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世祖 쿠빌라이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1273년 4월 몽장 炘都·洪茶丘와 고려의 ★金方慶에게 명하여 탐라를 공략토록 했다. 麗蒙연합군은 潘南縣(반남현: 지금의 나주시 반남면)에서 출항했는데, 항해 중 큰 바람이 불어 軍船이 침몰하는 등 패닉상황이 발생했다. 炘都 등은 즉각 보충 兵船을 조달하고 병력 1만 명을 증강하여 4월 하순에 애월읍을 공격했다.
삼별초는 古城里의 내·외성에 들어가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敗勢(패세)에 몰렸다. 그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전멸했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쿠빌라이는 이곳을 몽골(元)의 직할 영토로 편입하고, 탐라국 招討司(초토사)를 설치했다. 招討使라는 장관 밑에 병사 1700명이 주둔했다.
쿠빌라이는 삼별초의 항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269년에 이미 탐라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 使者를 파견해 지리를 조사시킨 바 있었다. 이 조사에서 한라산 기슭에 牛馬의 방목에 적합한 초원이 있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또 한라산의 산림은 일본 원정을 위한 兵船 건조의 船材로 적합한 것도 알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를 일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耽羅摠管府(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할영토로 편입시켜 우선 몽골의 말을 들여와 방목시켰다. 또 한라산의 삼림은 고려의 造船所(조선소)뿐만 아니라 멀리 양자강 하구 닝포(寧波)까지 운반되어 造船材로 사용되었다. 탐라가 1290년 고려에 귀속된 후에도 元나라는 몽골인 牧子(목자)를 파견하여 잠정적으로 목장을 직영하기도 했다. 후세에까지 제주도가 우리나라 말의 主목장이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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