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39---麗蒙연합군의 출항지 合浦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8-04 22:16 조회1,721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麗蒙연합군의 출항지 合浦
11월3일 오전 8시40분 木浦(목포)발 馬山(마산)行 직행버스를 탔다. 마산은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征東行營(정동행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당시엔 合浦(합포)라고 불렸다. 몽골의 世祖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삼별초의 항쟁이 평정되자 일본 정벌을 서둘렀다.
合浦는 삼별초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는 합포에 세 번 출몰했다. 첫 번째는 元宗 12년(1271) 2월 삼별초가 합포를 침공하여 監務(감무)를 생포해 갔다. 두 번째는 元宗 13년(1272) 11월 삼별초가 다시 합포를 습격하여 함선 22척을 불사르고 몽골의 烽卒(봉졸) 4명을 사로잡아 갔다. 세 번째는 元宗 14년(1273) 1월 또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함선 32척을 불사르고 몽골 병사 10여 명을 잡아 죽였다.
몽골은 1271년(고려 元宗 12년) 국호를 「大元」으로 바꾸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딸을 元宗의 요청에 따라 세자 諶(심)과 결혼시켜 양국관계를 굳게 했다.
오후 3시 무렵 마산 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늦가을의 해는 짧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마산시청 문화관광과로 찾아가 학예사 구수익씨를 만나 자료를 얻었다. 구수익씨는 마산시립박물관 송성안 박사가 마산의 몽골유적에 관해 전문가라고 귀띔해 주었다. 마산시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자산동 고지대에 있는 마산시립박물관으로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전국 박물관이 모두 휴관하는 월요일이었다. 宋박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에게 『征東行營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바로 박물관 뒷산』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시 『麗蒙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했던 뱃머리가 어느 지점이냐』고 질문했더니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대우백화점이 보이는데, 그 왼쪽 일대』라고 대답했다.
우선, 분수대로 가서 제1차·제2차 麗蒙연합군 함대의 출항지였던 合浦洞(합포동) 일대를 촬영했다. 합포동이라면 「마산의 자갈치」인 오동동과 馬山灣의 맨 안쪽인 산호동 사이의 동네다. 그 옆으로는 마산수출자유단지가 펼쳐 있다. 「합포동」이란 洞名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마산항의 「어미땅」이다. 그 일대는 매립과 도시화로 인해 麗蒙연합군의 자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征東行營의 소재지였던 마산시립박물관 뒷산 주변은 현재 추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당시의 유적이나 遺構(유구)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산시립박물관을 빠져나와 자산동 18번지에 있는 蒙古井(몽고정)으로 찾아갔다. 산중턱에 위치한 박물관의 아랫동네(자산동 18번지) 큰길가에 있다. 바로 그 앞에는 1960년 4·19 혁명을 촉발한 馬山시위를 기념하는 「3·15 기념탑」이 서 있다.
몽고정은 몽골의 둔진군에게 用水를 공급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향토사학자 이학렬 선생에게 전화로 물으니 『몽골군이 판 우물은 모두 6개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론 그것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삼별초의 항쟁이 평정되고 고려와의 관계가 안정되자 이제 쿠빌라이는 日本정복에 나선다. 육상과 해양을 아우르는 大帝國 건설―이것이 쿠빌라이의 野望이었다. 몽골연합군의 제1차·제2차 일본 원정의 전투상황과 숨가쁘게 전개된 당시 東아시아의 정세 등은 日本과 中國 현지 답사 등을 통해 다음 호에 쓸 계획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