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41---80騎로 3만大軍을 막으러 나선 對馬島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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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06 23:23 조회1,581회 댓글0건본문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80騎로 3만大軍을 막으러 나선 對馬島主
12월1일 오전 8시30분, 記者는 쓰시마空港에 내렸다. 후쿠오카空港에서 日本航空 여객기 141편(요금 1만1950엔)을 타고 출발한 지 꼭 30분 만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코모다(小茂田)로 달렸다. 나가사키(長崎)縣에 속하는 對馬島는 우리나라 울릉도처럼 길이 좁고 험난하다. 평지는 드물고 온통 산이어서 대중교통수단은 별로 없다. 면적은 709km2, 우리나라의 濟州道보다는 작지만, 巨濟島보다는 크다. 인구 약 4만3000명으로 2004년 3월1일자로 市로 승격된다.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對馬島主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武士였다. 그는 즉각 一族郎黨 80여 騎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뒤따랐던 一族郎黨 중에는 助國의 아들 宗右馬次郞이라는 소년무사로부터 宗甲斐六郞이라는 칠순의 노인도 섞여 있었다. 이 80여 騎는 이즈하라 주둔 武士團의 총력이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10월6일 오전 2시경, 코모다에 도착한 助國은 오전 6시 眞繼男이라고 하는 통역을 넣어 해안에 상륙해 있던 몽골군 지휘관에게 그 來意를 물었지만, 몽골군은 雜談(잡담) 제하고 화살부터 메뚜기떼처럼 날렸다.
「宗氏家譜」에 따르면 助國은 부하들을 독전하며 300명의 상륙부대를 일단 바다로 물러나게 했지만,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助國은 戰死 직전에 郎黨의 小太郞과 兵衛次郞을 불러 「전장으로부터 탈출하여, 危急을 다자이후(大宰府)에 고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大宰府는 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鎭西奉行(大宰)의 政廳(정청) 소재지였다. 鎭西奉行은 히젠(肥前)國의 守護(수호: 가마쿠라 幕府 시대의 지방장관)인 쇼니 츠네쓰케(小貳經資)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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