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62---원나라行2차 (58-59세, 1269-12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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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12 조회1,414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추밀원부사로 계실때인 58세때 1269년 9월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원나라에서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자 충렬공께 원나라 사신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 오시도록 하였습니다.
충렬공께서는 원나라에 들리셨다가 그때 최탄과 한신의 무리가 북계(현재의 평안도지방)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계지방을 원나라에 바치려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를 기회로 몽가독(몽구트)을 장수로 하여 일단 동경(현재의 요양) 에 몽골군대를 주둔시키고 고려를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럴 때 원나라에 가 있던 태자 심 (후일의 충렬왕)과 당시의 재상 이장용은 충렬공께 몽구트 군사와 동행하게 하여 서경(현재의 평양)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 충렬공께서는 동경(요양)에 계시면서 몽골 군대가 고려 경내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노력하시다가 이듬해 59세때 서경을 거쳐 개경에 돌아 오시었습니다.
이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원사,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10년(원종)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차 떠나려고 하였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지금 몽가독이 만약 서경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대군(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면 임연은 이미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자라 필연코 주둔 군대의 양식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당여(黨與)가 아닌 자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러한 인물을 선택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즉 서북면)를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세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고 하였다. 곧 ★김방경에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군(원나라 군대)이 서경에 도착하여 만일 대동강을 넘는다면 왕정(개성)에서는 스스로 소란해져서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대동강을 넘어 서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황제에게 이 뜻을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리어 원군으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줄 것이라고 명령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고려사》 제26권 - 세가 제26 > 원종 2 >
9월 경술일에 임연이 추밀원 부사 ★김방경, 대장군 최동수로 하여금 몽고 사신과 함께 몽고로 가게 하였다. 임연이 황제에게 드리는 글에 이르기를
“전왕이 질환에 걸리더니 점차 위독하게 되었는지라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위까지도 손위할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항차 아우를 먼저 왕위에 오르게 하라는 것은 돌아가신 임금의 말씀이고 또 왕위는 하루라도 비워 두지 못할 일입니다. 그래서 국왕 왕창은 부왕의 유훈을 거역할 수도 없고 신하 된 도리를 어길 수도 없어서 마침내 부득이 임시로 국정을 대행하게 하였고 그 즉시로 사연을 갖추어 빨리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왕과 세자의 족속들의 무사 여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사신들이 보았으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여기서 보내는 사신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정을 모두 캐어 보고 인자한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제26권 - 세가 제26 > 원종 2 >
경오 11년(1270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왕이 박주(博州)에 들러서 먼저 최동수를 보내 몽고의 도당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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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일에 이장용, ★김방경, 곽여필이 동경으로부터 왕의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신해일에 왕이 동경에 도착하였는데 국왕 두연가(頭輦哥)와 조평장(趙平章) 등이 왕을 찾아와서 시종들을 물러가게 하고 종이와 붓을 준비한 후 왕에게 왕위 폐립(廢立)의 사유에 대하여 밀서를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풍병으로 인하여 손이 떨리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핑계하였다. 그래서 통역을 시켜 왕에게 질문하였는데 왕은 임연의 의사에 맞추어 말하기를
“황제께 올린 글의 내용과 같다”라고 하니 행성에서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아채고 더는 묻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기사 10년(1269), 송 함순 5년ㆍ몽고 지원 6년
○ 9월에 연이 추밀원부사 ★김방경을 몽고에 보냈다. 배신(陪臣)의 올린 표문[表]에, "전 왕이 병에 걸려 위독하므로 장차 분수를 지켜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여, 간절히 영화를 사양하고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또한 형이 왕위를 내놓을 때에는 아우에게 전하라고 한 것은 선왕의 말씀이었고, 또 이 번국(藩國)의 직책은 하루도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국왕 창은 만일 부왕의 명을 거스르면 신자(臣子)의 상도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여 부득이 임시로 국사를 통할하고 곧 일찍이 사유를 갖추어 빨리 아룁니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경오 11년(1270), 송 함순 6년ㆍ몽고 지원 7년
○ 몽고가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경에 주둔하였다. 과거에 세자가 임연의 난을 듣고 군사를 청하니, 몽고가 이에 몽가독에게 군사를 주어 장차 떠나려 하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몽가독이 만일 오래 서경에 있으면, 연이 이미 명을 배반하였으니 반드시 공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연과 통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서 함께 가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세자가 그 인선(人選)을 어렵게 여기니, 시중 이장용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이 두 번 북계를 진무하여 남긴 혜택이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김방경에게 몽가독을 동반하여 가게 하였다.
방경이 계책을 말하기를, "관군(官軍 몽고병(蒙古兵))이 서경에 이르러 만일 대동강을 건너면 서울이 저절로 혼란하여져서 장차 변이 있을까 두려우니, 황제의 명을 받아서 대동강을 건너지 말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모두 좋다고 말하고 마침내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들이 울며 방경에게 말하기를, "공이 만일 여기 있었다면 어찌 최탄과 한신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다투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다. 그때에 탄의 무리가 몽고 군사에 의지하여 속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나라를 빼앗을 뜻이 있어 몽가독을 후하게 대하고 날마다 간사한 꾀로 달랬으나, 방경이 매양 계책으로 저지하였다.
연은 왕이 몽고 군사를 청하여 옛 서울을 회복할까 염려해서 명을 거역하고자 하여, 지유 지보대(智甫大)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하게 하고, 또 신의군(神義軍)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탄과 신의 무리가 그 꾀를 알고 비밀리에 배[舟]와 매복할 군사를 갖추고 가만히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연의 무리가 장차 관군을 죽이고 제주도로 들어가려 하니, 청컨대, 관인(官人)은 나가서 사냥한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경군(京軍)이 왕래하는 상황을 살피어 서로 알려주면, 우리들은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보음도(甫音島)ㆍ말도(末島)에 나아가고, 관인은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임하면 저들이 나가지도 못하고 물러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 정상을 자세히 안 뒤에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야 왕경을 취할 수 있으니, 왕경(王京)을 취하고 나면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이 다른 사람의 차지가 아닙니다." 하였더니, 몽가독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오득공(吳得公)이란 사람이 최탄의 내상(內相)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은밀히 방경에게 고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하니, 득공이 말하기를,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가만히 정찰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방경이 몽가독의 관문(館門)에 나가니, 여러 군사가 모두 모이고 탄의 무리가 기뻐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몽가독이 방경에게 말하기를, "객지에 오래 있어서 심심하니 사냥으로 즐기겠다. 공은 나를 따르지 않으려는가?" 하였다. "어느 곳에서 사냥하려는가?" 하니,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ㆍ봉주에 이르러 초도까지 들어가겠다." 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관인도 황제의 명을 들었는데, 어찌 강을 건너려고 하는가?"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이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 것은 황제도 안다. 그대가 어째서 막는가?" 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나는 사냥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고 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할 뿐이다. 만약 사냥을 하려고 한다면 어찌 반드시 강을 건너 저 곳에 가야만 즐겁겠는가?" 하였다. 몽가독이 말하기를, "만일 강을 건너가는 것을 황제께서 죄를 준다면 내가 혼자 당할 터인데,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는데 관인이 어떻게 강을 건너갈 수 있는가. 만일 건너고 싶거든 반드시 황제의 명을 여쭈어라." 하였다. 방경이 은밀히 지보대(智甫大) 등에게 일러 군사를 물러나게 하니, 몽가독이 방경의 충성과 곧음이 천성에서 나온 것을 알고, 크게 공경하고 중히 여기어 사실대로 고하여 말하기를, "왕경을 멸하고자 하는 자는 탄의 무리뿐이 아니고 또 있다." 하였다.
■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 ▣
23[麗-58/29]
8월(☞원 지원 6년, 고려 원종10년, 1269년)에 세자 심(?)이 조정에 이르러 본국의 신하들이 제멋대로 식(식)을 폐하고 그 아우 안경공 창(?)을 세운 일을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사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와 이악(李?) 등을 그 나라에 파견하여 상세하게 알아보게 하였다. 9월에 그들의 추밀원사 ★김방경(金方慶)이 표를 받들고 알타사불화 등을 따라 들어와 예방하였다.
추밀원(樞密院)과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세자 심(?)이 「조정에서 만약 출정을 하여 능히 군사 3천을 갖추고 군량 5개월분을 준비한다면 관군이 국경으로 들어갈 때 신이 응당 같이 들어감으로써 백성들이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고 하니, 제(帝)께서 그럴 것이라 여겼다. 조서를 내려 식(식)에게 수여하는 특진·상주국의 작위를 세자에게 주고, 심(?)에게 칙서를 내려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그 나라의 난적에게로 달려가게 하였다. 초불화(抄不花)에게 명하여 그 나라로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결국에는 가지 못하자 조서를 내리고 대신하여 몽가도(蒙哥都)를 파견하였다.
■ <검푸른 해협 - 원작 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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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용은 임연에게서 몽골에 입조하여 세조의 노여움을 풀고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본래 세조에게는 잘 보이지 못했소. 지난번 입조때도 끝내 세조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병선을 만들고 징병할 것만을 명령받았을 뿐이었소. 국가의 중대사인 만큼 기쁘게 몽골에 다녀오고 싶으나 이번에는 ★김방경을 보내시오. ★김방경은 나와 달라서 세조도 그의 인품을 사랑하여 방경에 대해 몇 번이나 칭찬했다고 들었소. ★김방경의 말이면 신용할 것이오."
라고 이장용은 말했다. 그는 몽골에 입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김방경에게 맡기고 자신은 강도에 머무르고 싶었다. 원종 곁을 떠나기가 불안했던 것이다.
★김방경이 몽골 칙사와 함께 몽골에 들어가서 표문을 세조에게 바치기로 되었다. 앞서 곽여필이 아뢰기로 한 것과 거의 같은 표문이었다.
★김방경은 9월 초 강도를 떠났다. 이에 대한 세조의 조서를 가진 혁덕이 11월 11일에 강도에 닿았다. 그것은 원종 형제와 임연의 입조를 재촉한 것으로서, 세조가 일체의 사정을 들은 후에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몽골의 고려 출병 사실이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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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9
동경(東京, 요양)으로 들어간 날 밤, 이장용은 ★김방경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팔방으로 보냈으나 그 거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김방경만 만나기라도 하면 다소라도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연도에 가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지 그 조언도 들을 수 있을 것이었지만 이장용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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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8
일행은 섣달 그믐날, 청천강가의 박주에 도착했다. 이날 원종은 동경(요양)에 있는 이장용, ★김방경 두 사람이 보낸 사신을 만났다. 원종은 ★김방경, 이장용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동경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연도에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보낸 사자가 가지고 온 서면에는 두 사람의 중신이 사자를 보낼 정도로 심상치 않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최탄의 일당인 이연령이 군대의 파견을 청했고, 그에 대해 세조는 몽골 장군 몽구트에게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으며, 그 출동명령을 동경의 행성에 내렸다. 몽구트는 바야흐로 고려에 진주하고자 동경에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 원종께서 급히 사신을 세조에게 보내 이를 저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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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0
19일 저녁 무렵, 원종은 자신들을 맞기 위하여 동경에서 온 이장용, ★김방경을 비롯한 수십 명의 기병대들과 눈으로 뒤덮인 벌판 한가운데서 서로 만났다. 마중 나온 기병대는 두 줄로 나뉘어 길 양쪽에 늘어서서 원종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 그곳을 통과하면 그들은 그 뒤를 따르는 원종의 호위대와 하나가 되었다.
이장용과 ★김방경은 말을 몰고 와서 원종의 뒤를 따랐으나 원종의 명령으로 두 사람은 곧 원종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달렸다. 잠시동안 군신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장용이 강도를 출발한 것은 11월 27일이었으므로 원종은 이장용과는 40여일 만의 대면이었고, ★김방경은 9월에 강도를 떠나왔으므로 4개월만의 대면이었다.
서로가 할 말은 많았으나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각기 다른 장소에 있으면서 국난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보았고 그와 함께 스스로도 동요하고 있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원종이 맨 처음 꺼낸 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연도에 가셔서 세조를 뵙는 일이옵니다.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김방경은 눈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세조를 뵙는다고 고려로 출병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소?"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합니다. 몽구트군의 고려 진주는 고려 북부지역이 몽골의 직할지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고려로서는 나라의 판도를 상실하는 것이 되옵니다. 몽구트군은 동정(東征)의 조서를 받아 동경까지 와서, 지금 그곳에서 최후의 출동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중입니다. 출동 명령은 오늘 내려질지 내일 내려질지 모를 긴박한 상태에 있사옵니다만, 그것이 운좋게 오늘까지 내리지 않은 것은 전하의 입조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태자의 호소가 있어서 세조도 그것을 함부로 물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세조는 고려에 진주한다는 것을 분명히 정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어느 누가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최탄의 내부(內附) 청원을 이용해 임연을 처벌한다는 명목을 내세운 진주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침략이라 일컬어 마땅한 것입니다.
전하가 세조를 뵙고 사리를 내세워 호소하시면 세조도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되어 진주를 취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강의 상류를 누가 하류라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김방경이 말했다. 여전히 말을 더듬거렸으나 여느 때와는 달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김방경은 이번 일이 고려에서 발생한 두 가지의 불상사에 대한 세조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임연의 폐위사건과 최탄의 난을 이용한 세조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단지 세조는 태자 심의 호소를 함부로 물리치지 못할 정도이므로 원종이 만나기만 하면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는 어떻게든 수습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장용은 잠자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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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4
몽구트군에 처음으로 동경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9월 ★김방경은 몽구트군과 함께 동경으로 옮기라는 명을 받고 그 이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몽구트군의 병력은 ★김방경조차도 잘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부대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동경에서 후방으로 물러가는 부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후방에서 동경으로 들어오는 부대도 있었다. 왜 이렇게 끊임없이 부대를 교체해야만 하는지 ★김방경도 알지 못했다.
몽골의 수뇌부가 ★김방경을 몽구트와 함께 동경에 머무르게 한 것은 아마도 고려를 향한 진주가 시작되었을 때, 이 고려의 장군을 참모역으로 삼을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장용도 또한 같은 목적을 위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동경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음날인 12일 원종은 동경을 떠났다. 이방용, ★김방경이 원종을 수행하고자 행중서성에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원종 일행은 곧장 연도를 향해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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