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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63---원나라行3차 (62-63세, 1273-12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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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14 조회1,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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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진도와 탐라도에서 삼별초를 완전토벌하고 나서 시중으로 계실때인 62세때 1273년 7월에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원나라에 가셔서 세조 쿠빌라이의 환대를 받고, 일본 정벌과 관련한 명령을 받고, 이듬해인 1274년 1월에 개경으로 돌아 오셨습니다.

이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고려사》 제27권 - 세가 제27 > 원종 3 >

6월 초하루 임오일에 대장군 ★김수(金綬)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탐라도의 역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게 하였다.
“바다의 역적들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열하여 온 나라가 크게 걱정하고 있을 때에 당신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위력을 발휘하여 적을 격멸하였다.
생각건대 오로지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입어 옛서울로 나와 살게 되었는데 역적들이 일찍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호소하게까지 되었으며 당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죄인을 정벌할 것을 허락한 결과 역적의 괴수들은 비록 진도에서 패전하고 해산되었지마는 그 남은 무리들이 탐라로 도주해 갔던 것이다.
감격스럽게도 영명한 당신은 실정을 살펴보고 다시 관군을 파견하여 모조리 섬멸하였다. 그러나 만리(里)의 바닷길은 험하고도 어려우니 경솔히 건너갈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3군이 바닷길로 원정하는 것은 혹 어떨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5월 24일에 ★김방경의 승전 보고에 의하면 ‘대군이 4월 28일 이미 제주에 들어가 역도들을 처치하였으므로 온 지역이 평정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황실의 영혼과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 병선들이 순풍을 얻고 진격하였으며 완미한 놈들을 마른 잎사귀 쓸어 버린 듯이 숙청하였다.
승리의 보고가 전하여지자마자 온 나라 사람들은 기쁨으로 충만되었다. 나는 흉악한 무리들을 숙청하였으니 당신의 은덕이 심후함을 느끼며 우리 나라와 인민을 길이 보전하고 갱생(更生)하여 일편단심으로 자기 직분을 지킬 것이다. 만수무강을 바란다.

정유일에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니 왕이 심히 흡족하게 여겨 그를 위로하고 자기 손으로 붉은 가죽 띠 한 벌을 그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장병들을 위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가을 7월 을미일에 시중 ★김방경이 황제의 소환을 받고 원나라에 갔었는데 황제는 금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문채 있는 의복과 금, 은을 그에게 주었다.




■<고려사절요>
계유 14년(1273), 송 함순 9년ㆍ원 지원 10년

○ ★김방경이 아들 수(綬)와 지후(祗候) 김감(金?),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와서 승전을 보고하였다. 왕이 수를 대장군으로, 감을 공부 낭중으로, 보를 중랑장으로 삼고 대정 고세화는 앞장 서 나가 적진을 함락하였으므로 낭장으로 임명하고, 그밖의 다른 사람들도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 6월에 대장군 김수를 보내어 원 나라에 가서 탐라의 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였다.
○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니 왕이 붉은 가죽띠 한 벌을 하사하고 장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윤월에 탐라에 주둔하였던 장군 송보연이 적의 괴수 김통정의 시체를 찾아 아뢰고, 또 적장 김혁정(金革正)ㆍ이기(李奇) 등 70여 명을 수색 체포하여 다구에게로 보내니, 모두 죽였다.
○ 원 나라에서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였다.
○ 아들 순안후(順安侯) 종(悰)과 동지추밀원사 송송례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후와 태자의 책봉을 하례하였다.
○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으로, 변윤을 판추밀원사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로, 나유ㆍ송보연을 함께 대장군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시중 ★김방경이 부름을 받아 원 나라에 가니, 황제가 금으로 만든 안장과 채색 의복 및 금ㆍ은을 하사하였다.



■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都.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검푸른 해협- 원작 풍도>
p185
그러나 이런 일에 연연해 할 수 없을 만큼, 탐라도 평정을 계기로 모든 것이 빠르게 원종의 주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6월에 둔전경략사 흔도는 세조의 부름을 받아 원으로 돌아가고, 이어 7월에는 ★김방경 또한 갑작스런 명을 받고 원으로 갔다.
-----생 략-----

초가을이 되자, 7월에 부름을 받고 원으로 입조한 ★김방경이 보낸 사자가 왔다. 그에 의하면 ★김방경이 세조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하자, 丞相(승상)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 魚饌(어찬)을 향응받고, 金鞍(금안), 綵服(채복), 금은을 하사받아 그 총애를 비할 자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김방경은 이런 세조 쿠빌라이의 특별한 환대를 탐라 정벌에 대한 恩賞(은상)으로는 보지 않고, 곧 자신에게 중대한 임무가 더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또 ★김방경은 원종에게 이제야말로 고려로서는 나라를 일으켜 군신이 함께 일대 국난에 대처할 결의를 해야 하는 시기라는 어투로, 자신이 원의 수도에서 느꼈던 것을 전했다. 일대 국난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정벌군의 출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p188
지난해가 다 저물도록 내린 눈이 그치고 1274(지원11)년, 원종 15년 정월 초하루가 밝았다. 하늘은 맑게 개고, 눈부신 햇살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고려의 산과 들에 내리쏟아졌다. 개경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생 략-----
원종은 이날 궁중에서 형식만의 축하 잔치를 열어, 조정의 신하, 원의 무장, 관리들의 하례를 받았다. 개경 거리는 초하루에 이어 그 이튿날도 북적거렸다. 도로는 더욱 진탕길이 되어 갔고, 엄청난 수의 다양한 사람들이 그 진흙탕 속을 어제보다는 느린 속도로 걸어갔다. 이날 이런 도읍지 개경으로 ★김방경과 그 수행원 일행이 돌아왔다.

★김방경은 즉시 원종을 알현하여 정월 초하루의 축하 잔치에 맞추지 못했음에 용서를 빌고, 세조가 일본 정벌에 쓸 병선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그 명령은 큰 배 3백 척을 전라도와 탐라도 두 곳에서 만들고, 5월을 그 기한으로 한다고 했다.

★김방경은 세조의 명령을 전한 다음, 자신이 반년 가까이 원의 수도에 머무르면서, 결국 힘이 미치지 못하여 이러한 명령을 받게 되었음을 사죄했다. 이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자신은 죽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라가 지금까지 없었던 어려움 속에서 다시금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혼이 몸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종은 이제 어떤 소식을 들어도 놀라지 않았다. 자신도 ★김방경과 같이 나라와 함께 일찍이 없던 국난을 헤쳐 나갈 결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김방경은 일본 정벌 명령이 여러 장수에게 내려지는 것은 3월이며, 출발은 초여름으로 예정되어 있다면서, 고려가 이 때문에 아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의 군사와 노역자를 징집해야겠지만, 그에 대한 세조의 명령은 홍다구가 머지않아 받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홍다구가 ★김방경보다 조금 늦게 6일 아침 개경으로 들어왔다. 홍다구 역시 ★김방경과 마찬가지로 즉시 입궁하여 원종을 알현했다.
홍다구는 이번의 大船(대선) 3백 척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자, 노동자, 목재, 그 밖의 물건 전부를 고려가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造船官(조선관)으로 고려의 신하 허공을 전주도 도지휘사로, 홍녹주를 나주도 도지휘사로 임명할 것, 그리고 그 위에 조선감독관으로 ★김방경을 동남도 도독사로 임명하라는 중서성의 명령을 원종에게 전했다.
-----생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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