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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64---원나라行4차 (64세, 12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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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15 조회1,5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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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1274년의 제1차 일본정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문하시중으로서 64세때인 1275년 1월 8일 일본정벌 후의 고려의 궁핍한 상태를 호소하기 위하여 세조 쿠빌라이를 알현하기 위해서 원나라로 떠나서 3월 신묘일에 돌아 오셨습니다.

충렬공의 4차 원나라행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을해 원년(1275년) 봄 정월 초하루 계유일에 신년 축하 의식을 그만두게 하고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멀리 북경을 향하여 신년을 축하하고 서전(西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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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일에 시중 ★김방경, 대장군 인공수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글을 보내기를
“우리 나라는 근자에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과 많은 군사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로 인하여 이미 수년간에 걸쳐 가가호호에서 징수하였고 게다가 또 왜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전함들을 건조하는데 장정들은 모두 그 역사에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늙은이들과 약한 자들만이 남아서 겨우 밭갈이와 씨뿌리는 일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가물이 들고 나중에는 홍수가 나서 곡식이 여물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가의 수요를 빈민들에게서 징수하는데 몇 말 몇 되에 이르기까지 모두 쌀 항아리를 털어서 바치었으므로 벌써 나무 열매나 풀잎을 먹는 백성들이 있다.
아마도 백성들의 영락과 피폐가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출정 군인으로서 부상하였거나 물에 빠져 죽고 귀환하지 못한 자들이 많으므로 비록 남은 인민들이 있기는 하여도 한 달이나 일 년에 그들이 소생하여 숨돌리기를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만약 일본 정벌을 또다시 일으킨다면 거기에 소용되는 전함들과 군량은 실로 우리 나라에서는 공급할 능력이 없다. 결국 나라가 파멸되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직접 보지 않았으니 응당 그렇게까지야 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이나 나의 간절한 이 호소를 양해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을유일에 왕이 죽판궁에 처소를 옮겼다.

3월 경진일에 왕이 왕륜사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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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일에 왕과 공주가 북산(北山) 낙산사(洛山寺)에 갔다. 문하시중 ★김방경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왕이 서경으로 피서(避暑)하러 갈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더니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을해 원년(1275), 송 효공황제(孝恭皇帝) 덕우(德祐) 원년ㆍ 원 지원 12년

○ 봄 정월에 공주를 책봉하여 원성공주(元成公主)로 삼고, 궁(宮)을 경성(敬成), 전(殿)을 원성, 부(府)를 응선(膺善)이라 하며 요속(僚屬)을 두고,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았다.
○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 나라에 보내어 표문에 올려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을 소탕하느라고 대군의 군량을 벌써 몇 해를 두고 집마다 거두었으며, 게다가 왜국을 정벌하려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여 장정은 모두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이 겨우 밭갈고 씨뿌렸는데, 처음에는 가물고 나중에는 홍수가 져서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軍)ㆍ국(國)의 비용을 가난한 백성에게서 모아 들이니 백성의 피폐함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전쟁에 상하고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남은 백성이 있으나 어느 세월에 소생될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 하더라도 필요한 전함과 군량은 실로 소방에서 감당할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셔서 애절한 호소를 알아 주소서.” 하였다.




■<검푸른 해협 - 원작 풍도>
p211
정벌군 2만 5천명중 전사 또는 익사한 자는 무려 1만 3천 5백명, 병선 대부분을 잃었다는 보고가 개경의 충렬왕에게 전해진 것은 12월 초순이었다. ★김방경이 제일 먼저 개경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홍다구, 유복형, 흔도의 순서로 원의 통솔자들이 2,3일씩의 간격으로 개경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

1월 4일, 흔도, 홍다구, 유복형 등은 원나라로 돌아갔다. 8일 그들을 뒤쫓듯이 ★김방경 또한 세조를 알현하기 위해서 원나라로 향했다. ★김방경의 입조는 세조에게 입조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려의 궁핍한 상태를 호소하고, 고려에 주둔한 패잔병들에게 공급할 식량을 면제받기 위해서였다.
-----생 략-----

2월 하순에 원에 입조했던 ★김방경에게서 처음으로 사자가 왔다. 충렬왕은 곧 사자를 맞이했다.
"선유일본사로서 두세충, 하문저가 이번에 연도를 출발했으니 3월 초에는 개경에 닿을 것입니다."
사자는 이렇게 첫 말을 꺼냈다. 충렬왕은 이 사자의 말을 중간까지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고 무릎을 세웠다. 하지만 일어서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마치 대지가 몹시 흔들려 이제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생 략-----

충렬왕은 지난 1월 8일에 고려의 어렵고 궁한 상태를 호소하는 표문을 ★김방경에게 주어 세조에게 보냈다.
우리나라는 최근 역적 삼별초를 제거함에 있어 대군의 양식을 몇 년에 걸쳐 집집마다 거둔 일이 있사옵니다. 게다가 왜국 정벌로 인하여 백성은 전함을 만들고 장정은 모두 공역에 징발되었기 때문에 노약자만이 겨우 농사에 종사하여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장마가 져서 수확할 수 없었사옵니다. -----생 략-----

그러나 충렬왕의 표문에 대해서 세조 쿠빌라이로부터는 어떤 답신도 없었으며, 세조의 의지는 갑자기 선유일본사 파견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생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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