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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65---원나라行5차 (65세, 12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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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16 조회1,4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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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중찬으로서 65세때인 1276년 7월부터 10월까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들어가셔서 원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고려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호두금패를 받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 오시었습니다.

⇒⇒⇒<검푸른 해협 -원작 풍도>에는 3월부터 6월까지 남송 평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들어가셔서 원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고려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호두금패를 받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 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생일이 9월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풍도의 작가인 정상정(이노우에 야스시)이라는 사람이 잘못 인식하였거나, 고려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3-6월에 한번 더 다녀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충렬공의 5차 원나라행에 대한 고려사, 원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가을 7월 을미일에 원종(元宗) 신주를 종묘(宗廟)로 옮겨 부제하기로 하였으며 평장사 이세재(李世材), 채정(蔡楨)을 원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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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찬 ★김방경, 직사관 문련(文璉)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글을 보내었는바 그 하나는
“달로화적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은 총명, 민활, 청렴, 공평하므로 백성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고 있으니 임기는 이미 만료되었으나 계속하여 유임시켜 주기를 바란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의 평제(秤制-저울에 관한 제도)가 귀국과 달라서 전자에 16근짜리 저울 한 대, 열 근 반짜리 저울 추 한 벌, 서 근 두 냥짜리 저울 추 한 개를 받아서 전국에서 사용하게 하고 있으나 아직도 골고루 다 돌아가지 못하니 저울대와 저울추를 각각 5백 개씩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임술일에 이의방(李義邦)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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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일에 ★김방경이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받고 이어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니 왕이 성 밖까지 나가서 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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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 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고려사절요>
병자 2년(1276), 송 단종(端宗) 경염(景炎) 원년ㆍ 원 지원 13년

○ 가을 7월에 유경(柳璥)을 첨의시랑 찬성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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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찬 ★김방경과 직사관 문연(文璉)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는데, 왕이 원 나라 중서성에 상서(上書)하기를, “다루가치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은 밝고 민첩하며 청렴하고 공평하여 백성들이 그 덕을 입었는데, 임기가 이미 찼으니 유임하도록 해 주기를 바랍니다. 배신 ★김방경은 관군을 보좌하여 진도(珍島)와 탐라를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건조하며 해상에서 병력을 과시할 때 실지로 공이 있었으니,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여 후인을 권장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1] ▣

13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2년, 1276년) 7월에 심(?)이 그들의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11월에 심이 그들의 판비서사사 주열(朱悅)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이름을 춘(?)이라 고친 것을 아뢰어 왔다.




■<검푸른 해협 - 원작 풍도>
p223
이듬해인 1276(지원13)년 1월 20일, 세조로부터 병선과 무기 제조를 중지하라는 조서가 내렸다. 이것은 고려 군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가운 소식이었다. 충렬왕은 무슨 이유로 병선과 무기 제조가 갑자기 중지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으나 어쨌든 일본 재정벌이 취소되었든가, 아니면 지난해 1월 ★김방경이 가지고 간 고려의 사정을 호소한 표문의 취지를 이제야 세조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연말 신년 賀正使(하정사)로서 입조한 조신중 한 사람이 3월 초에 귀국했으나, 무기 제조 중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송의 수도였던 臨安(임안)에서 목숨을 보존하던 송의 잔존세력이 마침내 항복함으로써 송의 평정이 비로소 이루어졌고, 그것을 축하하느라 연도가 몹시 들떠 있다는 것만을 전했다.

왕의 명에 따라서 송나라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서 ★김방경은 3월 중순 개경을 출발하여 원에 입조, 5월 초에 上都(상도)에서 세조를 알현했다. 상도의 왕궁은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세조 쿠빌라이에 의해 평정된 송의 항복한 장수들이 계속해서 정복자를 알현하기 위해 상도에 들어오는 중이었다. 세조는 송의 항복한 장수들을 몹시 관대하게 대했으며, 그것은 ★김방경의 눈에도 좀 이상하게 비쳤다.

★김방경은 한 달 동안 상도에 머물렀다. 일본 재정벌에 대해서 세조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기 전에는 귀국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1월에 내린 무기 제조 중지 명령은 지난해 12월 초에 세조의 마음을 스친 하나의 상념의 표현이었을 것이며,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현재의 세조가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단하기 어렵다. 지난해 12월은 송과의 전투가 계속되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는 예상조차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양양성의 공략에도 이럭저럭 6년이 걸린 것을 보면, 송의 수도 임안의 함락이 이렇게 간단히 끝날 줄은 세조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것이 금년 1월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이 결판이 나고 만 것이었다.

★김방경은 송을 완전히 항복시킨 지금, 세조 쿠빌라이가 일본 재정벌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세조를 알현하긴 하였으나 그것을 불쑥 물을 수는 없었다.

5월 초에 송의 패장 하귀, 여문환, 범문호, 진혁 등이 상도에 와서 세조를 알현했다. ★김방경도 명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날 ★김방경의 자리는 항복한 장수들보다도 상위였다. ★김방경은 이름만 들은 적이 있는 송의 명성 높은 장군들과 만났다.
진혁, 범문호, 여문환 등은 1275(지원12)년 초에 항복하였고, 하귀는 임안 함락 후에 항복하였다. 오랫동안 원과 적대 관계였던 이들 장군들을 세조 쿠빌라이는 시종 웃음을 띠며 대하였다.
-----생 략-----

야율희량은 몽골 건국 공신 야율초재의 현손이 되는 인물이었다. 희량의 말을 통해 ★김방경은 세조 쿠빌라이가 송의 장군과 병사를 동원하여 일본 재정벌을 계획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상도의 왕궁에서 송의 항복한 장수들과 만난 며칠 뒤, ★김방경은 귀국 인사를 하기 위하여 세조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김방경은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虎頭金牌(호두금패)를 하사받았다. 東方의 무인으로 金符(금부)를 차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6월 ★김방경은 귀국했다. ★김방경은 충렬왕을 배알하고 자신이 상도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상세히 아뢰었다. 아울러 일본 재정벌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것은 주로 새로 항복한 송의 장병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고려에 그 여파가 미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과 같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김방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김방경이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중서성에서 화살을 제작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1월에 일단 중지 통고를 받았는데 반년도 지나기 전에 다시 원래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생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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