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66---원나라行6차 (67세, 12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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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19 조회2,148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위득유, 노진의 등에 의한 김방경 무고사건으로 홍다구에 의한 고문과 대청도 유배시인 67세때 1278년 7월초에 장순룡과 함께 상도(개평부)에 도착하여 무고사건에 대한 해명후 충렬왕 일행과 함께 연도(대도,북경,대명부)를 거쳐 동경(요양)을 거쳐 9월초에 고려에 돌아 오시었습니다.
충렬공의 6차 원나라행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관련 기록이 너무 길어서 정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으나 잘 정리된 것인지 의문입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생 략-----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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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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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경신일에 왕이 궁궐 내에서 친히 기도를 드렸다.
계해일에 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김방경을 귀양 보낸 것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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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황제가 해동청(매) 한 연(連-한 쌍)과 부마 금인(駙馬金印)과 말 안장을 주었다. 왕이 동궁(東宮)에서 전송연의 술을 마시었다.
계묘일에 왕이 하직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겁설(숙위의 뜻) 단안(丹安), 독구(禿丘)로 하여금 북경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또 탈탈아 등 세 명의 관원을 보내 동문 밖에서 전송하게 하였으며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왕을 따라 귀국하라 하였다. 황태자 역시 사람을 보내 전송하였으며 황자 탈환(脫歡), 황녀 망가대도 모두 이르렀다. 여러 관원들이 달달(達達)의 노래와 춤으로 왕을 위로하면서 술잔을 권하니 왕은 홀적 가운데서 노래를 잘 하는 자를 시켜 감황은곡(感皇恩曲-은덕을 감사하는 곡조)을 불러서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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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무인 4년(1278), 송 제병(帝昺) 상흥(祥興) 원년ㆍ원 지원 15년
○ 장순룡과 백거가 원 나라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왕을 뵙고 아뢰기를, "다구가 황제께 군사 3천 명을 더 보내 달라고 청하여 그 중 2천 5백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는데, 황제가 왕이 아뢴 것을 허락하여 도로 철수하게 명하였으며, 다구가 또 전라도에 탈탈화손(脫脫禾孫)을 두도록 청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고, 또 칙명으로 ★김방경 부자와 득유ㆍ진의 등이 왕을 따라 조정에 들게 하여 대질 변명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따라가는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이분희와 이습이 아뢰기를, "흔도와 다구가 원래 이 일을 따지기를 싫어하였으니, 지금 비록 성지(聖旨)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필시 칙명의 문서가 없다 하여 듣지 않을 것인즉, 조정에 들어가서 다시 청한 후에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원수부에서 듣지 않는다면, 성지를 어기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순룡을 보내어 방경 등을 불렀다.
국인이 본래 분희 형제가 다구와 사이가 나쁜 것을 의심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더욱 믿게 되었다. 순룡이 방경 부자와 득유ㆍ진의를 데리고 원 나라로 가는데,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진의는 혀가 짓물러 죽었다.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득유 ?문에 이렇게 되었다." 하니, 득유가 이 말을 듣고서 침식을 잃고 늘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한숨만 쉬었다.
○ 황제가 왕에게 해동청(海東靑) 1연(連)과 부마(駙馬)의 금인(金印)과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황후는 공주에게 채단 한 수레를 하사하며, 겁설(怯薛) 단안독구(旦安禿丘)에게 호송하게 하였다. 북경에 이르러 ★김방경에게 명해서 왕을 따라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검푸른 해협 - 원작 풍도>
p280
충렬왕이 세 번째 (첫 번째 6월17일, 두 번째 7월초, 세 번째 ? )알현을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에, ★김방경 부자가 10여명의 일행을 데리고 상도에 들어왔다. 잇달아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수척함과 여행길의 피곤함이 노 재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나 위득유도 1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도착했다. 노진의도 함께 개경을 출발했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노진의을 뒤쫓듯이 위득유도 또한 상도에 들어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열을 내고 혀가 짓물러 하룻밤을 앓다가 죽었다.
7월 17일 고려에서 발생한 ★김방경 사건에 대해 세조의 판결이 내렸다. 이것은 중서성을 통해 충렬왕에게 전해졌다.
---★김방경을 무고한 자 둘 다 죽었으므로 대질시킬 방법이 없도다. 짐은 이미 방경의 억울함을 알기 때문에 이를 용서하노라. 흔도와 다구의 군대와 종전군, 합포진수군으로 하여금 모두 귀환토록 명하노라.---
충렬왕은 세조의 조서를 다 읽고 나자 ★김방경에게 건네 주었다. ★김방경이 그것을 보고 있을 때 비로소 감동이 충렬왕의 온몸에 퍼졌다.
-----생 략-----
★김방경은 조서를 받들어 그것을 왕에게 돌려주고 경건한 태도로 아무 말없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김방경에게는 세조라는 인물이 한층 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보였다. 갑자기 조서를 뒤집어서 엿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충렬왕은 즉시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배알하기를 청하였더니 곧 허락이 내려왔다. 세조의 조서가 내린 다음날 충렬왕은 ★김방경을 데리고 왕궁에 입궐하여
"신이 앞서 다구군의 소환을 아뢰오 청했더니 사정을 듣고 곧 허락하시고, 게다가 다른 군대도 소환하신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느낌이 북받쳐 오로지 만수무강을 기원할 뿐입니다."
그렇게 세조에게 말했다. 이날 세조는 말이 적었으나 시종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충렬왕은 ★김방경으로부터 세조에게 모든 군인이 철수할 때 양민이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세조에게 다짐해 달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세조는 곧,
"그 일은 이미 지령했으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으리라. 누구도 경의 나라 백성을 한 사람도 납치하지 않으리라."
라고 말했다. 충렬왕은 이때 문득 세조가 전면적으로 이쪽의 희망을 들어준 것에 대하여 이쪽도 또한 세조의 입장에선 발언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 략-----
그러고 나서 세조 쿠빌라이는 ★김방경에게 건강에 대해 물어본 후, 김 재상은 지금까지 짐과 몇 번이나 만났느냐고 물었다. ★김방경이 그것을 세 보려고 하자,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저으며,
"그대는 가을의 상도를 모를 것이나, 상도는 가을이 가장 좋다. 이번 가을에 한 번 와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 잠깐의 알현으로 제한된 시간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7월 21일, 충렬왕과 공주 쿠쓰루가이미시는 귀국인사를 위하여 입궐했다. 그리고 세조로부터 해동청 한쌍과 부마고려왕 금 도장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왕의 일행은 상도를 출발하여 북경(大名府)를 향해서 남하했다. 세조는친위대에게 호송하도록 했다.
북경에는 연도로부터 와의 일행을 전송하기 위해 온 황자 토곤, 황녀 몽구타이를 비롯하여 조신 관리 등이 많이 모여 일행을 위한 송별잔치를 열었다. 연회는 야외에서 행해졌다. 가무가 있는 성대한 잔치로 왕은 마지막에 고루치(宿衛士) 중에서 노래를 잘하는 자에게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곡을 부르게 했다.
고루치는 모두 다 기품이 있는 고관의 자제들로 원의 관인들은 그들의 행동을 칭찬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붉은 석양이 연회석을 물들이고 충렬왕과 공주, ★김방경의 얼굴도 붉어졌다.
★김방경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번의 왕과 공주의 입조가 대성공을 거두어 모든 것이 고려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간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방경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오래 살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재상인 원부에게 속삭였다.
충렬왕의 일행은 북경에서 이틀을 머물고 그곳에서부터 곧장 고려를 향해서 동쪽으로 갔다. 상도를 떠난지 꼭 한달째인 8월 23일 충렬왕은 홍다구와 만났다. 그 지점은 동경까지 닷새 정도를 남겨 둔 곳이었으며, 홍다구는 자신의 임지였던 동경을 떠나 상도를 향하는 길이었다.
-----생 략-----
홍다구는 완전히 타국 사람으로서 말을 하고 있었다. 만남은 극히 짧은 시간으로 끝났다. 홍다구는 정중히 왕고 공주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 자리를 물러갔다. ★김방경은 끝내 홍다구에게 한마디도 하지않고, 홍다구도 또한 ★김방경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그쪽으로는 시선조차도 보내지 않았다.
-----생 략-----
P286
왕의 일행은 천천히 여정을 계속하여 8월 28일 동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9월 7일 압록강을 건너기 이틀 전에 귀국도중인 다루가치 장국강과 만났다. 왕은 한적한 시골의 사원에서 장국강을 위해 송별잔치를 열었다.
장국강은 역대 다루가치 중에서는 눈에 띄게 온후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평했고, 고려 백성은 그를 덕으로 삼아 존경하였다. 두 번의 무고사건에도 그는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 없었다. 충렬왕도 ★김방경도 장국강과는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9월 7일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서 5개월만에 지금은 동녕부 관할 아래에 있으나 고려국임에는 틀림없는 지역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다음날 8일 일행은 이번에는 역시 철수 도중에 있는 부다루가치 석천말구의 일행과 만났다. 석천말구는 왕을 뵙고 딴사람 같은 태도로 재임중의 잘못을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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