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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67---원나라行7차 (67-68세, 1278-12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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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20 조회1,6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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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원나라에 가셔서 무고사건을 해명하고 1278년 9월초에 고려에 돌아오신후 무고사건의 배후 조종자이며 고려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는 이분희 일파를 충렬왕과 함께 처단하였고, 이를 조사하러 나온 원의 속노가(쓰루카)를 따라 12월말에 원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언제 고려로 돌아오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충렬왕이 다음해 2월에 돌아오신 기록으로 보아 충렬왕을 모시고 같이 고려로 돌아오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렬공의 7차 원나라행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겨울 10월 임자일에 왕이 왕륜사에 갔다.
계축일에 ★김방경을 첨의(僉議) 중찬(中贊) 상장군(上將軍) 판 감찰사사(判監察司事)로 임명하고 은 10근을 주었다.
조인규, 인후를 경상도에 파견하여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호적에 등록하게 하였다.
갑인일에 왕이 ★김방경을 불러다가 비밀히 의논하고 이날 밤에 밀직사(使) 이분희(李汾禧)를 백령도에 그 아우 지신사 이습을 조홀도에 귀양 보내었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 모두 바다에 넣어 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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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일에 중찬 ★김방경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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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계미일에 ★원나라에서 속노가(速魯哥)를 보내 이분희 형제를 죽이고 지득룡(池得龍)을 귀양 보낸 일 및 종전군 진수군의 처부(妻婦)들을 조사하여 데려간 일에 대하여 물었다.
갑신일에 재상들이 왕에게 친히 ★원나라에 입조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그것을 허락하였다.
신묘일에 경한 죄를 범한 자들을 석방하였다. 왕이 ★원나라에로 떠나갔다. 참문학사 박항, 지밀직사사 홍자번, 우부승지 김주정 등이 왕을 따라갔다.
병신일에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
정미일에 왕이 ★원나라에 도착하였다.
이달에 속노가가 중찬 ★김방경, 판 밀직 허공을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고려사절요>
무인 4년(1278), 송 제병(帝昺) 상흥(祥興) 원년ㆍ원 지원 15년

○ ★김방경을 첨의중찬 상장군 판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監察司事)로 삼고, 은 10 근을 주었다.
○ 밀직사 이분희(李汾禧)를 백령도(白翎島)에, 그 아우 지신사 이습(李?)을 조홀도(祖忽島)에 귀양보내고 그들의 가산을 적몰(籍沒)하였으며, 얼마 후에 사람을 보내어 모두 바다 속에 빠뜨려 버렸다. 습은 왕에게 총애받게 되자, 내시들의 청탁을 일체 들어 주지 않아 그 무리들이 항상 이를 갈았다. 마침 위득유(韋得儒)의 사건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흉흉하게 되자, 분희가 밤에 다구(茶丘)에게 몰래 가서 일을 의논하고, 습도 왕에게 권하기를, "이것은 ★김방경 자신의 일이니, 간여하지 마셔야 합니다." 하니, 국인은 분희 형제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하였다. 왕이 원 나라에 입조할 때에, 김주정(金周鼎)ㆍ박구(朴球)ㆍ염승익(廉承益)이 여러 번 그의 단점을 말하고 중랑장 최심(崔深)이 이를 증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주정 등이 내관들의 말을 듣고 왕에게 풍간(諷諫)하니, 왕이 방경을 불러 은밀히 의논하고 드디어 두 사람을 귀양보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다구가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도당(都堂)에 고하고 그 일을 조사하여 밝힐 것이니, 죽이는 것이 낫다." 하여, 모두 물에 빠뜨린 것이다. 습이 죽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 청주 목사 손세정(孫世貞)과 녹사 지득룡(池得龍) 등 16명을 해도(海島)에 귀양보냈다. 그들은 모두 다구에게 붙어 다니던 자들이다.
○ 찬성사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유경(柳璥)이 사직하니, 중찬 ★김방경을 판전리사사로, 박항(朴恒)을 참문학사로, 설공검(薛公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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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찬 ★김방경이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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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속로가(速魯哥)를 보내어 이분희 형제를 죽이고, 지득룡 등을 귀양보낸 사건과 종전군(種田軍)과 진수군(鎭戍軍)이 처를 취한 일을 따졌는데, 이는 다구(茶丘)가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 신묘일에 왕이 원 나라에 갔다.
○ 속로가가 ★김방경과 허공(許珙)을 데리고 원 나라로 돌아갔다. 공주가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왕이 이미 입조(入朝)하여 국가가 텅 비었으니, 방경과 공은 황제의 명이 있다면 함께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데리고 갈 수 없다." 하니, 속로가는 그들을 돌려보내려 하였는데, 김보성(金甫成)이 듣지 않았다. 보성은 원래 북계(北界)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반하여 요양(遼陽)으로 들어가 다구의 심복이 되면서부터 분희ㆍ습과 함께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속로가를 따라왔는데, 그 동안 우리에게 따져 물은 것은 모두 그의 계책이었다.




■<검푸른 해협 - 원작 풍도>

충렬왕은 원에서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4일, ★김방경과 상의하여 오랫동안 원나라 사신들과 내통하며 나라에 해를 끼친 무리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최초로 이름이 오른 것은 밀직사 이분희, 그의 아우 지신사 이습이었다.
이분희 형제는 원종 시대부터 궁중에서 활동해 오던 폐신이었고, ★김방경 무고사건 때는 홍다구와 내통하여 ★김방경을 제거하려고 한 장본인이었으며, 위득유 노진의를 움직이던 배후 인물이었다.
왕은 이분희를 백령도에, 이습을 조흘도에 유해한 다음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했다.

다음으로 홍다구의 일당으로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었던 청주목사 손세정, 또 청주의 녹사 지득룡 등 16명을 섬으로 유배하였다.

충렬왕은 윤 11월 사신을 세조에게 보내어 그들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 상주했다. 12월 5일 원의 사신으로 단사관 스루카(속로가)가 와서 이분희 형제를 죽인 것, 손세정 지득룡 등을 섬으로 유배시킨 것과 둔전군 진수군의 처자를 나라에 억류한 것 등에 대하여 물었다.
사신 스루카 외에 동경에 머물고 있는 고려인 김보성도 그 일행이었다. 재신들 중에 김보성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는 홍다구의 심복 부하이며, 이분희 형제와도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자 이들 사신 일행이 갑자기 고려 군신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로 비쳤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홍다구가 이 사신의 파견에 한몫한 것이 틀림없었다.

★김방경도 다른 재상들도 사태를 중대시하여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충렬왕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논의한 결과 충렬왕이 입조하여 친히 세조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로 했다. 고려로서는 이 기회에 만전을 기해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충렬왕은 원에서 귀국한지 (9월초) 겨우 두달이 지나 다시 입조길에 올랐다. 개경을 떠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이번 일행은 100명으로 공주와 동행한 때와는 달리 연일 눈비가 내리는데도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그달 29일에는 벌써 연도(대도,북경,대명부)에 들어섰다.

알현은 금방 허락되지 않았다. 충렬왕은 신년하례연에 참석했을 뿐으로, 그대로 20여일을 하는 일 없이 불안하게 보내야만 했다. 1월 18일이 되어서야 알현하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충렬왕은 연도의 화려한 궁전에 들어가 세조 쿠빌라이에게 절을 한후 안내되어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고 나서 자신과 서로 마주하듯이 건너편 자리에 홍다구, 쓰루카, 김보성 등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어사대부 유레룬, 추밀부사 보라 두 사람이 나타나
-----생 략-----

p294
그로부터 이틀 뒤에 충렬왕은 연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홍다구가 이분희 문제로 다시 고려에 화를 끼치려 했던 사건은 이것으로 해결이 된 셈이었고, 충렬왕은 세조 쿠빌라이의 온정이 여전히 자신과 고려에 따뜻하게 내리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 략-----

2월 10일 왕은 귀국했다. ★김방경을 비롯한 재신들은 사태가 커지지 않고 무사히 해결된 것을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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