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68---원나라行8차 (69-70세, 1280-12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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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2 12:22 조회1,637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69세때인 1280년 11월 신년축하차 賀正使(하정사)로 연도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제2차 일본정벌의 명을 받고, 70세때인 이듬해 1281년 2월초에 개경에 돌아오시고, 다음달인 3월달에 제2차 일본정벌의 길에 오르셨습니다.
충렬공의 8차 원나라행에 대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검푸른 해협(원작 풍도)의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병인일에 중찬 ★김방경, 장군 정인경(鄭仁卿)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신년을 축하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 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충렬공 54세, 1265년1월-5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고려사》 제121권 - 열전 제34 > 효우 >
김천
김천은 명주(溟州) 아전이며 아명은 해장(海莊)이다.
고종 말년에 몽고병이 침범하였을 때 그 모친과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포로로 잡혀 갔다. 그때 김천이 나이는 15세였는데 밤낮 울며 지내다가 잡혀 간 사람들이 도중에서 다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친 상을 예법대로 지켰다. 그 후 14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자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장마당에서 사흘 동안이나 ‘명주 사람 있소!’라고 외쳤다. 때마침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응답하니 습성이 말하기를
“김씨라는 여자가 ★원나라 동경(東京)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소’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당신은 해장을 아는가?”라고 하였다. 김순이 “나의 친우이다”라고 말하고 그 편지를 받아다가 김천에게 전해 주었다. 그 편지에
“나는 살아서 어느 주(州) 어느 마을 누구 집에 와서 노비로 되었다. 배고파도 얻어 먹지 못하고 추워도 얻어 입지 못하고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한다. 그 동안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누가 나의 생사(生死)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천은 이 편지를 읽고 통곡하였으며 식사 때마다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하였다.
김천은 가서 모친을 속신(贖身)하려 하였으나 집이 빈한하여 재물이 없었으므로 남에게서 은(銀)을 꾸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모친을 찾으러 가겠다고 신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가하지 않으므로 되돌아왔다. 그 후 충렬왕이 ★원나라로 입조(入朝)할 무렵에 또 서울로 와서 청하였으나 조정의 결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김천은 오랫동안 서울에 묵고 있으면서 옷은 해어지고 식량도 떨어져 우울하게 지나가던 중에 도상에서 같은 고을 중 효연(孝緣)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하소연하니 효연은 말하기를
“내 형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으로 가니 당신은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 주선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김천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모친의 편지를 받은 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그간 모친의 생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도중에 불행히 강도나 만나면 목숨과 돈을 빼앗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천은 “가서 못보더라도 목숨과 몸덩이를 어찌 아끼겠는가?”라고 말하고 드디어 효지를 따라 동경에 들어가서 우리 나라의 역어 별장(譯語別將) 홍명(弘命)과 함께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로 가서 모친이 있는 곳을 찾았다.
★원나라 군졸 요좌(要左) 집에 갔더니 한 노파가 나와서 절을 하는데 누더기옷에 머리는 쑥대머리요. 얼굴에는 때가 더덕더덕 묻었다. 김천은 그 노파를 보고도 자기 모친인 줄 모르고 “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으니
“나는 본시 고려 명주 호장(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인데 동생인 김용문(金龍聞)은 이미 진사(進士)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 김종연(金宗衍)에게 출가하여 해장과 덕린 두 아들을 두었더니 덕린은 나를 따라 이곳에 와서 있은 지 이미 19년이 되었소!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소! 오늘 뜻밖에 다시 우리 사람을 보게 되었구려!”라고 하였다. 김천은 이 말을 듣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었으며 어머니도 김천의 손을 쥐고 울면서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고나!”라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집에 없어서 김천은 어머니를 속신하지 못하고 동경으로 가서 별장 수룡(守龍)의 집에 한 달이나 유숙하다가 수룡과 함께 요좌 집에 다시 가서 속신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김천이 애걸복걸하여 은 55냥으로 겨우 속신하였다.
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김천은 도보로 따라왔으며 김덕린은 동경까지 배송 와서 울면서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러서 김천의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않았으며 ★원나라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하여 증명서를 교부하며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하였다.
<고려사절요>
경진 6년(1280), 원 지원 17년
○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시작하기를 청하니, 좋은 말로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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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이 다시 노년으로 사직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지금 천자께서 동정(東征)한다는 명을 내렸으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아뢰어 원수(元帥)를 임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공이 없는 사람을 청한다면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며,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 11월에 3관(官)과 5군(軍)을 검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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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이 다시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간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 ★김방경이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12월에 허공(許珙)을 참문학사(?文學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지첨의부사로, 송분(宋?)ㆍ이존비(李尊庇)를 지밀직사사로, 박구ㆍ김주정을 동지밀직사사로, 김백균(金伯均)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 왕이 마제산에서 사냥하였다.
○ 조인규와 인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로 삼고 인장을 하사하였다. 또 ★김방경을 관령 고려군 도원수(管領高麗軍都元帥)로, 박구ㆍ김주정을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昭勇大將軍左右副都統)으로 삼고 모두 호두금패인(虎頭金牌印)을 하사하였으며, 조인규를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宣武將軍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으로 삼고 금패인을 하사하였고, 박지량 등 10명을 무덕강군 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로 삼고, 금패인을 하사하였으며, 조변 등 10명을 소신교위 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로 삼고 은패인을 하사하였고, 김중성(金仲成) 등 20명을 충현교위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로 삼았다.
신사 7년(1281), 원 지원 18년
○ 2월에 재신과 추신들이 수강궁(壽康宮)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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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방경에게 궁시(弓矢)ㆍ검ㆍ백우갑(白羽甲)을 주고, 또 활 1천 개, 갑주(甲?) 1백 벌, 반오(絆?) 2백 벌을 주어 동정(東征)하는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 5월 무술일에 흔도ㆍ다구와 ★김방경ㆍ박구ㆍ김주정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검푸른해협 -원작 풍도>
p324
12월 왕은 賀正使(하정사)로서 ★김방경에게 입조할 것을 명하였다. 왕은 세조 쿠빌라이가 동방 정벌에 대해서 어떤 계략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고려가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에 관해 ★김방경에게 타진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자국의 참상을 호소하는 최후의 상주를 하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1281(지원18)년은 ★김방경에게도 고려에도 원만하지 않은 해였으므로 늙은 신하로서 마지막으로 충성을 다할 작정으로 그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30명 정도의 일행을 데리고 개경을 떠났다. 개경을 떠나는 날은 우연히 전날부터 눈이 내려 천지는 온통 흰색으로 뒤덮였으나 ★김방경 일행은 사슬처럼 길게 한 줄을 이루면서 개경을 빠져 나갔다.
-----생 략-----
1월 4일, 일본행성우승상 阿喇罕(아라한), 범문호, 흔도, 홍다구 네 사람의 장수에게 出師(출사) 명령이 내렸다. 그날 세조는 연도의 大明殿(대명전)에서 군신의 하례를 받았다. 고려의 하정사로서 ★김방경은 세조를 알현하고 하례를 올린 다음, 4품 이상의 관리들이 출석할 수 있는 궁중 연회에 참석했다. 세조는 ★김방경에게 명하여 승상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온화한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위로의 말을 건넨뒤 쌀밥과 어육을 하사하고
"고려인은 이것을 좋아하더군."
하고 말했다. ★김방경은 연도에 와서 짧은 기간 동안 두 번 세조를 알현했다. 한번은 정일본도원수로 임명됐을 때 그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입궐했고, 또 한번은 부름을 받아 고려군의 상황을 아뢰고 백성의 참상을 호소했을 때였다. 두 번 모두 세조는 온화하고 따스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앞서 두차례의 알현때도 그랬으나, 이 대명전의 하연에서도 ★김방경은 어떠한 경우에도 웃지 않았다. 웃음기조차 얼굴에 띠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다른 모든 얼굴이 웃어도 ★김방경만은 웃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강하게 웃음을 금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웃을 수가 없었다. 세조의 다른 하나의 얼굴이 끝없이 고려의 노 재상을 감시했다. 그러한 ★김방경은 주위 사람들 눈에 정성과 공손을 다하는 정직한 노 무인으로 보였다.
연회에 참가한지 사흘 만에 ★김방경은 귀국하게 되었으나, 귀국에 즈음하여 세조로부터 동방 정벌의 명령을 받았다. 강남에서 떠나는 아라한, 범문호의 10만명에 이르는 제1군과 고려 합포로 가서 그곳에서 떠나는 흔도, 홍다구가 이끄는 제2군이 일본의 이키지마에서 서로 만나 곧장 일본을 향해 행동을 개시하나, 제3군인 고려군은 시종 흔도와 홍다구가 통솔하는 제2군과 행동을 같이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방경은 활, 화살, 칼, 白羽甲(백우갑)을 하사받고, 또 정벌 장병에게 나누어 줄 활은 1천, 갑옷과 투구 1백, 戰袍(전포) 2백을 하사받았다.
★김방경은 상도를 출발, 2월초에 귀국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자, 어명으로 즉시 고려의 모든 군에 대해 출동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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