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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79---충렬공과 불교3 (몽산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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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4 12:30 조회1,6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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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보 제77집 (1994.2, 일지사)

●蒙山德異(1232-?1298)의 行績과 年譜 (허흥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몽산덕이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중국의 고승이다. 몽고 세력의 확산으로 南宋이 멸망한 1232년에 남송에서 태어나 몽고의 침략을 받았던 청장년기에 격동의 시대를 양자강 남쪽에서 修學과 出家, 그리고 修道로 보냈던 임제종 양기파에 속한 고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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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에 다녀가지 않았으나 그의 저술이 조선시대까지 유행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불교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제자인 鐵山紹瓊(철산소경)이 몽산의 死後에 고려에 3년간 머물렀었고, 고려말의 고승들도 몽산의 유적을 탐방할 정도로 깊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가 고려의 動安居士 李承休에게 간접적으로 감화를 주었고, 그의 제자 철산소경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특기될 정도로 고려의 불교계는 물론 조선을 거쳐 오늘날의 불교계에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다. 그는 국어학계와 서지학계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국사학계의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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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이지만 몽산의 생애를 보충하고 이를 토대로 연보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몽산행실기>를 포함한 23매의 사본을 들 수 잇다. 이 사본은 지금까지 전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고 내용은 그의 어록의 일부라 추측되므로 잠정적으로 <몽산화상어록초고>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이는 지질과 필치를 바탕으로 작성연대가 구명될 필요가 있으나 우선 그 내용을 중요시하고 이용하고자 한다. 이를 수집하여 제공한 남권희 교수에 의하면 <直註道德經>과 같은 곳에 발견된 복장물의 일부로 추측하였다.

몽산은 다양한 지식인과 교류가 있었다. 官人과 居士는 물론 道家와도 열띤 토론을 벌였고, 그의 저술은 불교는 물론 유교와 도교와의 사상적 관련성이 컸을 정도로 해당 사상가와 교류가 깊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감화를 준 사상가는 禪宗 楊岐派의 高僧이었다. 그의 스승은 환산정웅이었지만 그 밖에도 여러 선승으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33세시 8월 출가후 行脚과정에서 그에게 감화를 준 고승들은 모두 임제종의 양기파에 속한 고승이었다.

그는 여러 고승으로부터 감화를 받았으나 법통을 이은 사승은 환산정웅이었다. 특히 설암조흠은 14세기 후반의 태고와 나옹으로 연결될 정도로 우리나라 조계종의 법통에 연결된다. 그의 대표적 계승자인 철산소경은 고려에 다녀갈 정도로 고려의 조계종 수선사 계통과 유대가 깊었을 뿐 아니라, <증집속전등록>에는 철산이 고려출신이라 하였다.


<1295-1300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과의 교류>

1295 (몽산63세) 乙未 충렬왕 21년
겨울에 了庵元明長老,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人의 道友가 三韓(高麗)으로부터 와서 조용히 지내기를 같이함.

1296 (몽산64세) 丙申
여름. 中孚上人 등 4人의 道友가 고려로 돌아감
겨울. 고려의 萬壽上人이 왔고,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혼구, 정녕원공주왕씨 묘지, 명순원공주왕씨 묘혜, 전도원수 상락공 김방경, 시중 한강, 재상 염승익, 재상 김흔, 재상 이혼, 상서 박경, 상서 유거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어 문답함.

1297 (몽산65세) 丁酉
仲春, 法門(十松)景致의 序文을 씀 (十松序)

1298 (몽산66세)
상인을 통하여 萬恒이 몽산의 서문이 있는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구함 (덕이본 육조단경 序)
2월 2일 십송설의 서와 가송의후서를 씀 (십송서)
4월 12일 동안거사 이승휴에게 법어를 보냄 (동안거사집)

1300
고려에서 만항이 덕이본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간행함 (덕이본 육조단경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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