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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80---충렬공과 불교4 (<諸經撮要>와 <法門景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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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4 12:32 조회2,0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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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학논집 제21집 (1994.12, 한국도서관 정보학회)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들과의 교류 -필사본 <諸經撮要>의 수록내용을 중심으로- (남권희/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조교수)

필자가 이 자료를 구하게 된 것은 1994년 봄 시중의 서점에서 일단의 불교자료를 살피던 중에 일부가 낱장으로 체계가 없이 흩어져 있는 필사본 하나를 보게 되어 구입하게 되었다. 그후 자세히 살펴보니 어느 정도의 연결과 복원이 가능하여 정리를 마쳤으며 표지의 서명은 <諸經撮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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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중에서 몽산과 관련된 것은 약 40개항에 이르고 대체로 이전의 다른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중 休休庵銘은 몽산의 주 활동장소로서 또 휴휴암 좌선문과 관련이 되어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료는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法門景致>가 원정 정유 중춘(사실은 대덕 원년, 1297.2)에 이루어지고 그 後序는 원정 3년(사실은 대덕 원년, 1297.2.2)에 몽산에 의하여 쓰여져 고려의 공주를 비롯한 大臣, 名士들이 그를 찾은 기록이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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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 덕이의 저술 내지는 관련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은 그의 46세가 되던 1278년에 道德經을 直註하였으며 지원 24년(1287)에 <직주도덕경>이 상주로 무석현 梅王居士 坦(탄)의 도움으로 吳中 휴휴암에서 간행되었으며 지원 27년)1290)에는 <六祖壇徑>을 재편하고 유통에 노력하여 일반적으로 德異本 이라 불리는 것이 되었다. ---또 <동안거사집>에도 <上몽산화상사사법어> <화상소기법어> 등에서도 三轉語와 法語를 이승휴에게 준 기록이 전하고 있다.


法門景致에 대한 분석

이 부분은 전체의 필사본 중에서는 일부에 해당하지만 체제로 보아 먼저 몽산의 序가 있고 이어 十松에 관한 내용을 入門에 비교하고 이어 頌을 첨부시켰다. 본문의 뒤에는 역시 몽산의 後序가 있고 跋에 해당하는 伏(木빼고楮見)<공경하여 우러러 봄)에 ‘門人 高麗國長老 了庵元明 題’가 있어서 완전한 한권의 단행본 체제를 갖추고 있다. 더구나 이 내용이 入道의 龜鑑이 되므로 판에 새겨서 널리 전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완전한 단행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蒙山은 丁丑(1277)년 여름부터 澱山의 일을 마치고 中吳의 休休庵이라는 작은 庵子에 머물러 쉬고 있었다. 그가 63세 되던 고려 충렬왕21년(1295) 겨울에 고려에서 了庵元明 長老와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사람이 찾아가 같이 지내다가 충렬왕22년(1296) 여름에 仲孚上人 등 4사람은 돌아 갔다.

그해 겨울 萬壽上人이 몽산에게 가서 전하기를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混丘, 정녕원공주왕씨 妙智, 명순원공주왕씨 妙惠,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시중 韓공康, 재상 廉공承益, 재상 金공昕, 재상 李공混, 상무 朴공卿, 상무 柳공(옷의변居) 등 여러 사람이 재삼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하여 오므로 休休長老가 멀리 上庵에서 安居하고 있을 때라 나누어 施를 베풀었다. 몽산은 답을 하지 않고 만수상인을 청하여 요암장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생략---


그리고 몽산은 그와 만나기를 원하고자 하면 다음의 三轉語를 푸는 것에 따라 入門을 허락한다고 하니 모두 화두를 듣기를 원하였다. 이에 몽산이 내린 垂語는 다음과 같아서,
첫째, ---생략---
둘째, ---생략---
셋째, ---생략---
의 세가지 물음이었으나 이러한 물음에 모두 답할 수 없었다.

이에 몽산이 답을 내려 “내가 문 밖의 네 성인이 찾아와 쓰는 것을 보니 찬탄할 만하고 찾아온 여섯 사람은 평범한지라 모두 見拜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어 묻기를, “듣건대 열그루의 특이한 소나무들은 고려로부터 온 것이라 땅을 따라 솟았지만 네 성인은 모두 보이고 우리들 여섯 평범한 사람은 業障이 무거운 까닭에 눈이 있어도 우러러 보지 못합니다. 감히 청컨대 和尙께서는 자비를 보여 주소서” 하였다.

이러한 여섯 사람의 청에 따라 몽산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실로 믿음이 있어서 마땅히 頌을 내어서 이에 서문으로서 각각 보태니 바라건대 너희들은 믿음을 바르게 하고 눈을 트이게 하여 玄妙를 깨치도록 하라”는 가르침으로 十松의 頌을 보태고 이를 元貞 丁酉(1297) 仲春 月旦에 序文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 처음 등장하는 몽산의 三轉語는 그후 고려에 전해져 釋瓚이 편찬한 白雲景閑(1298-1375)의 <백운화상어록 上>에도 일부가 실려,
---생략---

한편 몽산을 찾아간 열 사람중 몽산이 인정한 네 聖人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각자의 행적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내원당 대선사 混丘(1250-1322)
보감국사로 청풍인이며 진정대선사 淸王+分으로도 알려져 一然의 직계문도는 아니었으나 비의 건립에 참가하고 1289년 운문사의 주지직을 맡았으며 이어 인각사와 보경사, 내원당의 주지직까지도 겸임하였다.
특히 내원당은 왕실의 願刹로서 그는 충렬, 충선왕 양대에 걸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迦智山門의 핵심적인 승려였다. <선문보장록>의 찬자로 추정되고 1293년 11월에 내원당에 거주하면서 곡사의 주지를, 1295년에는 보경사의 주지도 겸하였다.

(2) 정령원공주 왕씨 妙智
충렬왕의 공주로 정화궁주의 소생이다.

(3) 명순원공주 왕씨 妙惠
충렬왕의 공주로 정화궁주의 소생이다.

(4)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1212-1300)
본관은 안동, 16세에 산원으로 출발하여 감찰어사, 1263년에 지어사대사, 1269년에 元에 사신으로 갔다. 1270년과 1273년에 삼별초를 진압하여 개부의동삼사의 작위를 받고 1274년 일본정벌에서 실패하였다. 1281년의 일본정벌에도 실패한 이후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를 지냈으며 1295년 84세로 상락군개국공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入元의 행적이 많아서 1265(1차), 1269(2차), 1273(3차), 1274(4차), 1276(5차), 1280(6차)년의 기록이 있으나 본 연구자료에 의하면 1296년 즉 전해인 1295년에 상락공의 직위를 받고 이듬해에 충렬왕, 공주와 함께 제7차로 入元하였음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5) 시중 韓康(?-1303)
본관은 청주,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공부시랑, 간의대부, 국자대사성, 한림학사, 좌복야, 1287년에 첨의찬성사를 거쳐 첨의중찬까지 엮임하였다. 시호는 문혜이다.

(6) 재상 廉承益 (?-1302)
본관은 서원, 1287년 필도적이 되었으며 1281년 승지율학조교, 1287년 첨의평리에 이어 지도첨의사사, 1293년 판감찰사로 왕을 따라 元에 갔으며 1301년에 도첨의중찬을 지냈다. 시호는 충정이다.

(7) 재상 金昕(炘) (1251-1309)
김방경의 아들이며 1279년 독로화로서 元에 갔으며 후에 첨의평리가 되었다. 1290년 합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로로 판밀직사사를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다. 元에서 7년간 있다가 韓希愈(?-1306)가 죽자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 삼중대광이 되고 상락공에 襲封된 뒤에 귀국하였다.

(8) 재상 李混(1252-1312)
126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참군, 국학학정을 엮임하고 충렬왕때 첨의사인, 우부승지, 지밀직사사겸세자원빈, 도첨의찬성사판판도사사 등을 지냈다. 충선왕때 공을 세워 벽상삼한공신이 되고 밀직사사전조판서집현전대학사수국사를 거쳐 첨의정승에 이르렀다.

(9) 尙武 朴卿
고려사 열전중 염승익, 이분희(?-1278)조에서 鷹坊의 설치와 매 사육에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10) 상무 柳옷의변居(王+居)
충렬왕4년(1278)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정인경과 판통례로 元에 가서 한희유를 변호하고 함께 돌아옴

이상에서 살펴 본 열 사람과 충렬왕의 행적을 관련지어 볼때, 충렬왕은 太子때부터 使行이나 인질, 원공주와의 결혼 등의 사유로 5차례나 入元하였으며 재위기간 중에는 11차례에 걸쳐 김방경의 무고사건과 동정사, 하정, 하례 등의 일로 入元하였다.

그 중에서 8회째는 본 자료의 <法門景致>와 관련이 있어서 이때는 충렬왕22년(1296) 9월부터 동왕23년(1297) 5월까지의 8개월간 공주와 從臣 243인 총 590인을 데리고 세자의 결혼참석과 하정을 목적으로 하여 실제로는 元의 강압을 완화시키고 고종46년(1259) 이후의 포로를 송환받았다. 回賜品으로는 여러 것이 있었으나 왕과 공주는 金叚衣를 받았다.

즉 1296년 겨울에 몽산에게 몽산화상이 와서 고려의 열 사람이 뵙기를 청하였으니 바로 충렬왕의 入元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또 몽산이 十松頌과 序와 後序를 쓴 시기가 1297년 2월이니 역시 충렬왕과 공주 두 사람이 돌아가기 전과 일치하므로 이때 몽산의 글을 받아 왔으며 이때 了庵元明이 跋을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당시 金方慶이나 염승익 등이 元에 간 것은 다른 史料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이들은 현실정치를 떠난 상태로 있었으나 김방경의 아들인 金昕은 당시 이미 세력가가 되어 있었으므로 父子가 같이 몽산을 만나는 행적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의 행적에서 공주, 대신, 명사 등이 몽산을 모두 만나라 간 배경에는 이미 고려에서 몽산의 임제선이 지속적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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