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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81---충렬공과 불교5 (철산소경과 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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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4 12:34 조회1,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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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보 제39집 (1985.6, 일지사)

●高麗에 남긴 鐵山瓊의 行蹟 (허흥식/ 경북대학교 부교수)

<고려국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靜嘉堂文庫에 소장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에 이것의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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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文의 내용은 “鐵山和尙이 고려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관광하기를 바라던 차, 고려 道俗의 요청이 있어서 1304년 가을에 왔고, 강화 보문사에서 3본의 대장경을 보고, 그 가운데 許評의 부부가 봉안한 1본을 얻어서 강서 의춘현의 大仰山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줄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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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는 대장경을 옮기는 데에 관여했던 4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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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金恂이 글을 쓰고, 尹王+丘가 盖에 篆을 썼다는 점으로 보아 개석에 <고려국대장이안기>라 篆書하고, 釋 一牧은 이안기를 비로 세우는 지휘를 맡았고, 仰山寺 주지인 希陵이 참석하였다고 해석된다. 희릉은 철산의 제자로서 수행한 임제종의 승려라고 생각된다.

위의 4인 가운데 金恂과 尹王+丘는 고려사에서도 확인된다. 김순이 쓴 비문이 있고,*동화사홍진국존비는 김순의 글씨이다.  13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들이 역임한 관직도 기문의 기록과 상통하므로---

▶▶▶충렬공 3자 문영공(김순)은
1306년 (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회양부(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를 민지 찬, 김순 서하였다.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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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산이 관람한 곳의 하나는 강화의 보문사였음은 확실하다. 그곳에서 3본의 대장경 가운데 許評과 그의 처가 印成한 1본을 仰山으로 보냈던 사실이 이안기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장경을 옮길때 금강산 成佛寺의 沙門 一牧도 관여한 점으로 보아, 금강산과 그곳의 여러 사찰을 관람하고 일목과 계행하여 다른 곳의 안내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철산은 또한 오늘날 양주군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에도 머물렀던 발자취가 있다. 이색은 철산이 회암사의 書額을 남겼다고 적고 있으므로 빨라도 조선초까지 그의 글씨가 회암사에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그가 남긴 기록이나 행적은 많지 않으나 왕조 교체기의 斥佛로 훼손되거나 무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산이 고려에 올때 모시고 온 인물과 그가 3년간 머물렀던 사실을 보여 주는 귀중한 귀록이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보광사의 중창기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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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日+旦(권단)은 철산을 수행하여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렀던 사실이 유추된다. 이는 유점사에서 보관했던 古文書를 종합하여 1932년 활자화한 바 있는 유점사 본말사지에는, 夢庵老 野雲의 <유점사기跋>이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그가 1308년 10월에 跋文을 썼으며, 이는 바로 철산이 고려에 와서 머물렀던 시기와 가깝다. 이로써 금강산의 成佛寺에 있던 一牧이 고려대장경을 옮기는 데 협력하였음을 밝힌 이안기의 내용이 더욱 실감있게 이해된다.

유점사기 발문의 끝에는 권단의 호인 몽암, 법명인 야운이 모두 밝혀져 있다. 발문의 내용에는 유점사의 승 幹善의 협조를 받아 閔漬(黙軒居士)가 유점사의 遺文과 口傳을 모아 寺記(寺志)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1307년 겨울에 記文을 비로 세우려고 요양행성평장사 이헌 홍공(?洪君詳)에게 그 뜻을 알린 바, 그는 소중하므로 名筆을 구하기로 하고 吳興 출신인 한림학사 조맹?번에게 쓰도록 했다. 민지는 1년 앞서 대장경이안기도 썼으므로 권단, 철산 등과의 관계가 긴밀하였음이 재확인된다. 아울러 당시 元을 통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유점사기 발문을 통해서 하나의 뚜렷한 사례로 추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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