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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89---충렬공 성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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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17 11:17 조회1,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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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跋)

그때 문하시중 ♠최종준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기니 이때부터 그 명예가 세상에 뛰어나, 외직으로 나가서는 서북면 병마綠事가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郎將 監察御使로 전임하여 우창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도 듣지 않으니 어떤 대상이 권신에게 가서 참소하되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봉공하지 못한다" 고 하자, 이때 마침 공이 이르르니 권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고 하니,
공이 대답하여 가로되 " 전 어사와 같이 봉공할려고 하면 나도 또한 능히 할 수 있으나 다만 나의 중요한 근본요강은 국고를 채우는 데 있을 뿐이요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는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고 하니
그 참소하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권신도 또한 부끄러워 안색이 변하였다. 그때 공은 令旨대로 이를 다하고 돌아가니 국고가 만적하게 되었다.



▣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撰)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근면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시며 신의있고 후덕하시며 과묵하고 엄숙하시며, 비록 무관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재간이 능하시어 將軍으로서 給事中을 겸하시고 혹은 御史中丞을 겸하시고 혹은 金吾衛大將軍으로서 知閤門事와 또 知御史臺事를 지내시고 또 御史臺事를 지내시고 臺閣을 역임하면서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매사를 결단함에 있어 神明하고 늠름하고 엄숙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원에 따라 서북지방을 여러번 진압하시고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그 지방의 民謠는 지금까지도 공을 사모하고 있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상 늠연(凜然)하였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 김방경 행장 (1350, 안진 발)

♠大將軍을 또 배명하고 ♠지합문형부사와 ♠知御史臺事로 제수되고 ♠선군별감사를 겸하게 되니 매일 첫 닭이 울면 ▲선군청에 앉아서 訟事를 판결하고 날이 밝으면 ▲御史臺에 들어가서 모든 기강을 더욱 준엄하게 하였다.

그때에 좌승선 ★유천우가 오래동안 집권하고 있어 여러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위풍을 추증해서 아첨을 하는 터인데, 公이 등청길에 도중에서 홀연히 그를 만나자 말을 탄 그대로 읍만 하고 지나가려고 하니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조삼으로 왕명을 봉행하는데 3품이하는 피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그대는 유독 어찌하여 이와같이 대하는가?" 고 하니
公이 말하기를 "그대도 3품이요 나도 또한 3품이며 그대도 조삼으로 봉명하고 나도 또한 조삼으로 봉명하는 터이니 나는 예만 행할 따름이다" 고 하여 서로가 한참동안 다투다가, 公은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하고 곧 가버리니
천우가 깊이 혐의를 품고 무릇 公의 친족 중에서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도 번번히 억제하고 등용하지 않았으나 公은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이내 상국(원나라)의 ♠進奉使가 되어서 갈 때 나라의 노자돈(출장비)인 금, 은 등의 물품을 혹시 궐원이 있어 받을 사람이 없을 때는 행인(출장갔던 사람)들이 오직 써버린 바 있으나 公은 다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국고에 반납하였다.



《고려사》 제29권 - 세가 제29 > 충렬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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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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