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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렬공 金方慶 101---충렬공 1남 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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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작성일04-08-20 11:57 조회1,5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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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金資) ***충렬공---1남 선---1남 자 로 추정됨 ※형제(자, 승용, 승택, 승우) 항렬자 承자를 쓰지 않고 별도의 외자를 썼는지 알 수 없음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권신.
1322년(충숙왕 9) 정월 밀직사(密直使) 임서(任瑞)와 함께 대호군(大護軍)으로 성절부사(聖節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밀직사가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순제(順帝)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1339년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가자 국정이 공백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때 순제에 의하여 김지겸(金之謙)과 함께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임시로 나라 일을 맡게 되고, 이어 경화공주(慶華公主:충숙왕비)에 의해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김효인---김방경---1김선---2김승용 + 女(부 원관)
원진---원부---1원관(=원관일,=원정), 2원경---원충, 女

● 김승용(金承用) ***충렬공---1남 선---2남 승용
※김흔은 아버지(=충렬공 김방경)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김선)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흔 열전>
※---두 아들(후, 구)이 내(=이숙기)가 선군(先君, =김승용)의 오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울면서 지문(誌文)을 청하여---<1329년 이숙기 술, 김승용 묘지명>,
1329년 이숙기가 김승용 묘지명을 지었다. 그 묘지석이 언제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329(충숙왕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를 지낸 훤(#선16)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내부령(內府令)이 되었다.
1323년 정안군 종(定安君琮)과 함께 원나라 진종(晉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28년 밀직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원관(元瓘) ***충렬공---1남 선---2남 승용 의 처부,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하고, 초명은 정(貞). 김승용 묘지명(1329년 이숙기 술)에는 원관일(元瓘一)로, 경진보(1580년)에는 원정(元貞)으로 기록
※김흔이 1279년(충렬왕 5) 대방공 징(帶方公#징02)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다.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는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찬자는 閔漬(1248-1326), 서자는 김순(1258-1321, 충렬공 3남)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재상.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정(貞).
아버지는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부(傅)이고, 동생이 충렬왕 때 응방(鷹坊)을 관장하였던 경(卿)이며, 아들은 충숙왕 때 첨의찬성사에 오른 충(忠)이다. 세번 장가들었는데, 장인은 홍녹도(洪祿道)·곽세필(郭世弼)·김신(金信)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9년(충렬왕 5)에는 독로화(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다.
그뒤 고려에 돌아와 1287년 판비서시사(判#비58書寺事)·보문각학사를 역임하였고, 다음해에는 전법판서로 있다가 환관(宦官)과 내료(內僚)들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1298년 충렬왕이 복위한 직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9년(충선왕 1)에는 밀직사가 되었다.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이 자료는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閔漬(1248-1326),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69)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70)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71)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2)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 원부(元傅) ***충렬공---1남 선---2남 승용의 처조부, 원관(元瓘)의 부

?∼1287(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의 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에 보직되고, 1269년(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년(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유경(柳璥)·김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 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종행하였고,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 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김효인---김방경---1김선---3김승택 + 女(부 김혼)
김태서---김경손---김혼---女

● 김승택(金承澤) ***충렬공---1남 선---3남 승택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김영후는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 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정하여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김영후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8(공민왕 7).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훤(#선16)이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6월 조적(曺#적42)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이등공신에 봉해져 전(田)70결과 노비 5구를 받았다.
1352년(공민왕 1) 8월 이제현(李齊賢)·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며, 입시해서 시독(侍讀)할 때마다 칭찬을 받았다.
10월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 김혼(金琿) ***충렬공---1남 선---3남 승택의 처부

1239(고종 26)∼1311(충선왕 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경손(慶孫)이다.
1256년(고종 43) 석릉직(碩陵直:희종의 능지기)이 되어 내시에 적을 두었으며, 감찰사를 거쳐 충렬왕 때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종제라 하여 총애를 받아 대장군이 되었다.
1280년(충렬왕 6) 친교가 있던 상장군 김문비(金文庇)가 죽고 마침 자기 처도 죽자 김문비의 처와 간통하여 감찰사와 중방의 탄핵을 받고 외딴 섬으로 귀양갔다.
그뒤 풀려나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내고, 1297년 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 다음해 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역임하였다.
1302년 첨의시랑 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로 임명되고, 다음해 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侍郎贊成事判軍簿司事), 1305년 우중찬(右中贊)을 거쳐, 1310년(충선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자, 왕을 대신하여서 행성일을 맡아보았다.
그뒤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예에 익숙하여 원나라에서 연회를 할 때 단정히 홀(笏)을 잡고 앉아서 행주(行酒)하는 사람이 이르면 일어나 읍하고 마시니, 세조가 기뼈하여 말하기를 “이가 진실로 고려의 재상이다.”라고 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왕을 청하여 남산 서재에서 향연하였고, 숙비(淑妃)를 잘 섬긴 결과 만년의 봉작이 부원군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 김경손(金慶孫) ***충렬공---1남 선---3남 승택의 처조부, 김혼(金琿)의 부

?∼1251(고종 38). 고려의 장군. 본관은 경주. 초명은 운래(雲來). 평장사(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이며, 계림부원군 혼(渾)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장엄, 정중하고 온화, 관대하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담략(膽略)이 있어 거실에 있을 때도 항상 조삼(#조43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했다 한다. 음관(蔭官)으로 출발하여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231년 정주(靜州: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분견장군(分遣將軍)이 되었는데, 그때 몽고군이 정주에 침입하자 힘써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구주(龜州:지금의 평안북도 龜城)에 가서 박서(朴犀)와 합세하여 성을 굳게 지켜 적을 물리쳤다.
1233년 대장군(大將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37년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담양·해양(海陽: 경상남도 泗川郡) 등지를 휩쓸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형제를 나주에서 무찔러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그를 최우(崔瑀)에게 무고하였으나 거짓으로 밝혀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직되었다.
1249년 최항(崔沆)은 그가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보냈다.
1251년 최항이 계모 대씨(大氏)를 죽이고 대씨의 전부(前夫)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였는데,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 된다 하여 사람을 배소에 보내어 바닷속에 던져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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