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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효창공원을 지켜낸 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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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8-27 13:17 조회1,7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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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이승만 집권세력에 의해서, 1961년 5.16혁명세력에 의해서 효창공원의 애국열사 묘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 버리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는데,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로 보류되곤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1959년 효창공원 코앞에 효창운동장을 만들어 공원 입구를 막아 놓게 됩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백범 묘소는 강원도 어디 시골로 이전해 버리려고 했다고도 하는데. 이러한 때에 김두한이(당시 국회의원) 앞장서서 효창공원의 애국열사 묘역 이전을 막아 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현재 독립운동단체와 일부 정당을 중심으로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독립선열 묘역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문화재청 홈

종   목   사적   330호
명   칭   효창공원  (孝昌公園)
분   류   독립유적지
면   적   123,307㎡
지정일   1989.06.08
소재지   서울 용산구 효창동,청파동2가및마포구신공덕동,공덕동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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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고종 13, 1876∼1949)선생이 민족통일의 한(恨)을 품고 흉탄(兇彈)에 쓰러지자 국민장(國民葬)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一帶)가 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 화(化)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선생의 묘소(墓所)가 이곳(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方策)등에서 이견(異見)을 보이던 이승만영도하(李承晩領導下)의 당시 집권세력(執權勢力)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先烈墓所)를 교외(郊外)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不斷)하였는데, 그 일단(一端)으로 1959년, 봄부터 제 2회 아세아축구대회유치(蹴球大會誘致)를 구실(口實)로 묘소(墓所)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開設)을 추진(推進)하였다.

이에 독립투사(獨立鬪士) 심산(心山) 김창숙옹(金昌淑翁)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結成)되고 언론사(言論社)를 비롯한 각계(各界)의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여 묘소이전(墓所移轉)은 보류(保留)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犧牲)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開設)되었다. 이러는 동안 6·25동란(動亂)으로 인(因)한 자연파손(自然破損)도 있고하여 효창공원, 특히 선열묘소(先烈墓所)일대(一帶)의 훼손(毁損)은 극(極)에 달(達)한 형편이었는데, 5·16혁명이후(革命以後) 또다시 선열묘소의 서오릉(西五陵)(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신도읍(神道邑) 용두리(龍頭里))부근(附近) 이전(移轉)이 추진(推進)되었으나 역시 유족(遺族)과 사회각층(社會各層)의 반대로 보류(保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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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정신 막는 효창구장 철거를”  
[국민일보 2004.03.02 18:14:00]
        
백범 김구 선생과 순국 열사들의 묘역을 가리고 있는 서울 효창운동장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민족문제연구소 등 독립운동 관련단체들을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고 있다.

효창운동장은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의 묘역 바로 앞에 자리잡아 이곳이 독립선열 묘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효창공원 전체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철거론자들의 주장이다.

서울시의회는 1999년에도 효창운동장 철거를 추진했으나 축구협회 등이 “축구붐 조성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묘역 관리를 맡고 있는 백범기념관과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효창운동장 건립 목적이 독립정신을 훼손하려는 것이었던만큼 이 운동장을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며 “월드컵대회 개최로 축구경기장이 많이 건설돼 굳이 이곳을 축구장으로 유지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주로 축구 경기장으로 이용되는 이 운동장은 20여년 전 인조잔디구장으로 바뀐 뒤 최근에는 1년에 3∼4차례 초·중·고 축구대회 장소로만 사용될 뿐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이 운동장은 지난 1959년 당시 이승만 정권이 제2회 아시아축구대회 유치를 이유로 독립선열 묘역 바로 앞인 이곳에 짓기로 결정됐고 이듬해 효창동과 청파동,공덕동 일대 15만여그루의 소나무와 연못,자연섬 등을 희생시킨 끝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 축구장을 지음으로써 백범의 발자취를 없애려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연구자들에 따르면 백범은 해방 뒤 효창공원 일대를 독립선열 묘역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방 직후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시신을 모신 뒤 안중근 의사의 허묘를 세웠고 상하이 초대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과 차이석 조성환 선생 등의 묘소도 마련했으며 백범 자신도 암살된 뒤 이 곳에 묻혔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백범 선생께서 유언을 통해 ‘애국공원’으로 삼고자 하셨던 터를 널리 사용되지도 않는 운동장이 가리고 있다”며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 경기장이 많이 들어선 만큼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백범 선생의 원래 뜻대로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하는 성서로운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창호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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