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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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03 09:05 조회1,520회 댓글0건본문
●익재난고 제4권
시 詩
연우(延祐) 기미년주C-001에 내가 충선왕(忠宣王)이 강남(江南)의 보타굴(寶?窟)에 향(香)을 내린 데에 따라갔을 적에, 왕이 고항(古杭) 오수산(吳壽山) 다른 책에는 진감여(陳鑑如)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을 불러 나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고 북촌(北村) 탕 선생(湯先生)이 거기에 찬(贊)을 지었는데, 북으로 돌아와서 어떤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그리고 삼십이년 뒤에 내가 나라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주C-02 그 초상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그동안 늙음과 젊음이 차이가 생긴 데에 놀랐고 따라서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이 시기가 있음을 감탄하여 사십자를 써서 기록하다.
옛날에 남겨둔 나의 초상은/我昔留形影
양쪽 귀밑머리 푸르렀다오/靑靑兩?春
얼마나 많은 세월 흘러갔던가/流傳幾歲月
우연히 또 만나니 정신이 새로워라/邂逅尙精神
이 물건 다른 물건 아니라/此物非他物
전신이 곧바로 후신이라네/前身定後身
아희들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兒孫渾不識
서로가 누구냐고 질문을 하네/相問是何人
거서(車書)주D-003가 같으매 예악(禮樂)이 동으로 왔고 산악(山岳)의 정기 뭉쳤다네. 만인(萬人)의 종주(宗主)요 당세(當世)의 영웅이며 유학(儒學)에 통달했도다. 그 기품 정직하고도 넓으며 그 풍도 엄연하고도 공순하며 삼가는 그 말씨 순하기도 하여라. 여유 있는 용모에 온화한 화기며 꿋꿋한 중심일세. 충실한 학문에 도덕 또한 높으며 풍부한 문장이로다. 마음가짐 충성하며 정치함은 공평하고 국가를 보필하여 공을 세웠네. 명을 받고 등용되어 첨망(瞻望)의 대상으로 화충(和衷)하였고, 시옹(時雍)주D-04을 맞추었도다.
연우 기미년 구월 십오일에 북촌(北村) 늙은이 탕병룡(湯炳龍)은 칠십구세의 나이로 전당(錢塘) 보화독역재(保和讀易齋)에서 쓰다.
[주 C-001] 연우(延祐) 기미년 : 연우는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기미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이다.
[주 C-02]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 (1348) 12월 충목왕이 죽자, 왕위(王位) 계승 문제로 원(元) 나라에 표문을 올렸던 일을 말한다.《高麗史節要 卷二十五》
[주 D-003] 거서(車書) : 문화와 제도가 통일됨을 말한다.《中庸》 二十八章의 "지금 천하의 수레 제도가 같고, 같은 문자를 사용한다."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주 D-04] 시옹(時雍) : 백성이 선정(善政)에 감화하여 풍속이 변화됨을 말한다.《書經 堯典》
●익재집서
익재선생난고서 益齋先生亂藁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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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는 선조의 유상(遺像)인데 바로 시집 중에 "옛날 남겨둔 나의 얼굴, 양쪽의 귀밑털 새까맣구나[我昔留形影 靑靑兩?春]" 한 것이 이 초상을 두고 한 말씀이었다. 삼산(三山)의 종인(宗人) 윤(胤)이 이 초상본을 대대로 모시고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자, 이리저리 파손되어 거의 전할 수 없었으므로 화공을 불러 다시 모사하여 삼가 봉안(奉安)해서 영구히 전하게 하고 다시 소상(小像)을 그려 문집 첫머리에 붙여서 후손들에게 이 문집을 볼 때마다 우러러보고 사모하게 하였다.
신축(辛丑) 9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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