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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永嘉郡(영가군), 福州(복주), 그리고 安東大都護府(안동대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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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08 00:35 조회1,5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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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03권  

   발(跋)  

   김대사성 봉환교서축 발(金大司成鳳還敎書軸跋)  

    
윤회(尹淮)

고창(古昌)은 옛 고을이다. 혹은 복주(福州)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안동(安東)이라 일컬으기도 하였으니, 옛 제도를 그대로 답습 하기도 하고, 개혁하기도 하여 그 연혁이 한결같지 아니하였다. 산천이 깊고 높아서 그 험하고 견고함이 진(秦)나라의 2만 명이 다른 제후의 백만 명을 당하였다는 지리적 형세를 얻었고,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온화하여 신라 고대의 유풍이 있었다. 옛날 원(元)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두적(紅頭賊) 10여 만의 군중이 우리 강토에 깊히 침범해 들어와, 곧장 송도에 다달으니, 전조(前朝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황급히 남쪽으로 순회하여, 복주에 이르러 주필(駐蹕 임금의 행차가 머무르는 것)하고는, 주필에 따르는 모든 경비가 방대하니 혹시라도 백성들을 경도시킬까 몹시 우려하여, 벼슬 자리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어 성균 대사성 김봉환(金鳳還)공에게 명하여 그 고을의 목사로 삼고, 이를 진정(鎭定)하게 하였다. 공이 아전과 백성을 격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분주히 방문하며 시찰하되, 오래갈수록 더욱 더 부지런히 하니, 공민왕이 매우 편하게 여기고, 호종한 많은 신하와 호위 방어하는 군사와 아래로 천한 일을 하는 천류에 이르기까지 힘입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음 해에 적이 평정되자 복주목(福州牧)을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로 개칭하고, 공의 계급을 정순대부(正順大夫)에 승진시키고는, 교서(敎書)를 내려 권면하는 뜻을 유시하였던 것이다. 아, 감탄하지 않으리요. 김공의 변통하고 적용하는 유능한 재간이 아니면, 행궁(行宮)의 제반 포설(鋪設)을 능히 응할 수 없었을 것이요, 아전과 백성이 임금을 존경하고 웃사람을 친애하는 대의가 아니었던들 또 어찌 턱으로 지시하고, 눈짓으로 부려도 오직 공이 말하는 대로 곧 좇았겠는가. 그 윤음(綸音)과 교명(敎命)의 포상과 찬미를 아울러 받음이 의당하다. 공의 손자 전(前) 간대부(諫大夫)중곤(中坤)이 교서를 등사하여 한 개의 축(軸)을 장정해 이루고, 이를 항상 보존하고 공경히 받들며 자손에게 소명(昭明)히 보이려 하니, 대개 군상(君上)의 하사를 과시하며, 선조의 높은 업적을 현양하는 것이다. 나를 비루하다 하지 않고, 한 말을 얻어 발문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곧게 쓰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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