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39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02 (이규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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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4 10:17 조회1,659회 댓글0건본문
●동국이상국문집 연보
연보 서 年譜序
아들 ★함(涵)이 가공(家公)의 전후 문집을 만들고 나서 잇달아 공이 손수 지은 가장(家狀)에 따라 또 연보(年譜)를 만든다. 함이 옛사람의 문집과 연보를 보니 모두 연보 중에 그 저술한 본말과 이유를 소상히 적어 서로 참고가 되도록 하였으나 대개 옛사람의 시집(詩集)은 모두 저술한 연월을 꼭 나타내지는 않는다. 무엇에 의거하여 소상하게 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가공의 문집에는 연월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연대를 하나하나 다 기록할 수 없고 다만 10분의 1 정도쯤 적어 놓을 뿐이다. 그러나 공의 저작만은 한 해치이건 한 달치이건 간에 어찌 빼버릴 수 있겠는가?
●동국이상국문집 연보
연보 年譜
무자년(고려 의종(高麗毅宗) 22년, 1168)
공이 이해 12월 16일 계모(癸卯)에 탄생했는데 이름은 규보(奎報), 자는 춘경(春卿)으로 황려현(黃驪縣)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綏), 벼슬을 호부 낭중(戶部郎中)까지 이르렀으며, 어머니는 김씨(金氏)로 금양군(金壤郡) 사람이었다. 외조부(外祖父)의 이름은 중권(仲權), 나중에 시정(施政)으로 고쳤는데 중고(中古)의 명유(名儒)로서 급제(及第)로 뽑혀 벼슬이 울진 현위(蔚珍縣尉)까지 이르렀다.
공은 난 지 석 달 만에 나쁜 종기가 온 몸에 번져, 여러 가지 약을 써도 잘 낫지 않았다. 가군(家君)이 화가 나서 송악사우(松嶽祠宇)로 들어가 산가지를 던져서 생사(生死)를 점쳤는데 점괘에 ‘산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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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대정 21년(1181) 공의 나이 14세.
이해에 비로소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 최충(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해마다 하과(夏課) 대면 선달(先達)들이 제생(諸生)을 모아 놓고 정한 시간 안에 운(韻)을 내어 시(詩)를 짓도록 했는데 이 명칭을 급작(急作)이라 하였다. 공이 계속 일등으로 뽑히므로 모든 선비가 비로소 공을 뛰어나게 여겼다. ◀후에 김창 성명재 부흥, 하과시 교류, ◀강화 연미정 (고려 고종)
임인년 대정 22년(1181) 공의 나이 15세.
이해 6월에 또 하과(夏課) 급작(急作)을 지었는데 이때 마침 성명재(誠明齋) 안에 한림(翰林)에 제수된 자가 있어 ‘내직옥당(內直玉堂)’ 네 글자를 편제(篇題)로 삼고 운(韻)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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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 금(金) 명창(明昌) 2년(1191) 공의 나이 24세.
8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자, 천마산(天磨山)에 우거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칭하고 〈천마산(天磨山)〉를 지었는데, 중간에 유실되어 전집(前集)에는 기록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찾아서 후집(後集) 첫째권에 실었다.
임자년 명창 3년(1192) 공의 나이 25세.
이해에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과 전(傳)을 저술하여 자신의 행지(行止)를 차례로 이야기하였다.
계축년 명창 4년(1193) 공의 나이 26세.
이해에 백운시(百韻詩)를 지어 시랑(侍郞) 장자목(張自牧)에게 올렸는데, 장공이 후히 대우하여 매양 찾아뵐 때마다 술을 차려 함께 마셨다.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사실을 보고 이상히 여겨 고시(古詩)를 지어서 그 특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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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 명창 7년(1196) 공의 나이 29세.
4월에 경사(京師)에 난이 일어나서 자부(?夫)가 남쪽 황려(黃驪)로 귀양갔었는데 5월에 공이 자씨(?氏)를 데리고 자부에게 찾아갔었다. 이해 봄에 어머니는 상주(尙州) 원으로 나간 둘째사위에게 가 있었다. 6월에 공이 황려에서 상주로 가 어머니에게 문안하고 한열병(寒熱病)에 걸렸는데 몇 달 동안 낫지 않아 10월에야 돌아왔다. 시집(詩集)에 실려 있는 남유시(南遊詩) 90여 편이 모두 이때 황려와 상주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정사년 승안(承安) 2년(1197) 공의 나이 30세.
12월 어느 날 총재(?宰) 조영인(趙永仁)ㆍ상국(相國) 임유(任濡)ㆍ상국(相國) 최선(崔詵)ㆍ상국(相國) 최당(崔?) 등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공을 추천하였다. 우선 외기(外寄)에 보충시켰다가 후일의 문한(文翰)에 대한 책임에 대비하도록 간청하여 임금이 드디어 윤가(允可)하였는데 어떤 장주 승선(掌奏承宣)이 일찍이 공에게 조금 감정이 있어서 차자(箚子)를 빼앗아 천조(天曹)에 붙이지 않고 거짓말로 갑자기 잃어 버렸다고 핑계하니, 총재도 그 차자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명하여 공을 등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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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년 정우 7년(1219) 공의 나이 52세.
봄에 공이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외방(外方) 수령들이 팔관하표(八關賀表)주D-010를 미처 올리지 못한 자가 있자 공이 탄핵하려 했으나 금 상국(琴相國)이 굳이 그만두도록 하였다. 이달에 이르러 진강후(晉康候)가 이 내용을 조사하여 상국과 공을 탄핵하였는데 상국은 용서되고 공만 파직 당하였다. 4월에 외직(外職)인 계양도호부부사 병마금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鈐轄)이 되어 5월에 계양으로 부임하였다.
경진년 정우 8년(1220) 공의 나이 53세.
여름 6월에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로 소명(召命)을 받고 계양(桂陽)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지난해 9월에 진강후(晉康候)가 죽고 그의 아들 상국(相國)이 대신 정권을 잡은 까닭에 이 소명이 있었다. 12월에는 시태복소경(試太僕少卿)에 옮기고 기거주(起居注)는 그대로 두자 양사표(讓謝表)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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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고종 12년, 1225) 공의 나이 58세.
봄 2월에 사마시(司馬試) 시관(試官)으로 시부(詩賦)에는 이유신(李惟信) 등 16인을 뽑고 음시(音詩)에는 안겸일(安謙一) 등 5인을 뽑고 명경(明經)에는 강득희(康得希) 등 3인을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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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고종 15년 1228) 공의 나이 61세.
정월에 중산대부(中散大夫) 판위위사(判衛尉事)가 되었는데 딴 직함은 그냥 있었다.
5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춘장(春場)주D-011에는 이돈(李敦) 등 31인, 명경(明經)에는 국 수규(鞠受圭) 등 4인을 각각 뽑아 임금께 아뢰고 방방(放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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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고종 17년 1230) 공의 나이 63세.
11월 21일에 멀리 위도(?島)로 귀양갔다. 이해 팔관회(八關會) 잔치를 열 때 옛날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추밀(樞密) 차공(車公)이 시킨 것이었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왕유(王猷)가 밑에서 일보는 자가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몹시 꾸짖자, 차공은 왕유가 재상(宰相)을 꾸짖었다고 오해하여 임금께 일렀다. 마침 공과 좌승(左丞相) 송순(宋恂)도 그 좌석에 있었으므로 왕유를 도왔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모두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공은 이날 바로 청교역(靑郊驛)으로 나가 자고, 12월에 보안현(保安縣)에 이르러 머물다가 순풍(順風)을 기다려 26일에 위도로 들어갔다.◀위도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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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고종 19년, 1232) 공의 나이 65세.
지난 기축년(고종 16년, 1229)에 왕사(王師)가 죽었는데 이해에 문인들이 임금께 아뢰자 공에게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김효인 書
4월에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正議大夫)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 지제고(判?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6월에 도읍을 옮겼는데 공은 이 서울에 있었으나 집을 마련하지 못해 하음 객사(河陰客舍)의 서랑(西廊)에 살면서 시 두 수를 지었다. 9월에 유수중군 지병마사(留守中軍知兵馬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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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고종 21년, 1234) 공의 나이 67세.
5월에 춘장 지공거(春場知貢擧)로 열시(閱試)하여 김연성(金鍊成) 등 31인과 명경(明經)에 이 방수(李邦秀) 등 2인을 뽑아 방방(放榜)하였다.
12월에 정당문학 감수국사(政堂文學監修國史)에 제수되어 칙명(勅命)을 받고 송광사주(松廣社主) 법진각국사(法眞覺國師)의 비명(碑銘)을 지었다. ◀김효인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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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고종 23년 1236) 공의 나이 69세.
5월에 지공거(知貢擧)로서 춘장(春場)을 고시하여 박희(朴曦) 등 29인과 명경(明經)에 이극송(李克松) 등 3인을 각각 뽑아 방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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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고종 24년 1237) 공의 나이 70세.
7월에 칙명(勅命)을 받들고 동궁비주(東宮妃主)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공은 또 표를 올려 걸퇴(乞退)주D-012 하기를 매우 간절히 했다.
12월에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해에 또 칙명을 받고 대장경 각판(大藏經刻板)에 대한 군신 기고문(君臣祈告文)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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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고종 28년 1241) 공의 나이 74세.
공은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있었으나 국조(國朝)에 대한 고문대책(高文大冊)과 이조(異朝)에 오가는 서표(書表) 등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7월에 병이 심해지자, 진양공(晉陽公)이 듣고 이름난 의원들을 보내 문병과 치료를 끊임없이 하였다. 또 공의 평소에 저술한 전후 문집(前後文集) 53권을 모두 가져다가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빨리 새기라고 독촉까지 한 것은 공이 죽기 전에 한번 보이고 마음을 위안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역이 워낙 거창하여 그만 끝을 보지 못한 채 9월 초이튿날 갑자기 늘 누었던 자리를 떠나 바로 서쪽을 향해 누워 오른쪽 갈빗대를 자리에 붙이고 밤이 되자 잠든 듯이 졸하였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자, 놀라고 애통해 하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초상을 잘 치르도록 하고 또 근시(近侍)를 시켜 뇌시(?詩)를 지어 잘 죽은 것을 찬미하게 하고, 문순공(文順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12월 6일 경인(庚寅)에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공은 평생에 집안 살림은 경영하지 않고 늘 시(詩)와 술로 오락을 삼았는데 비록 의상(蟻床 침상)에 누워서도 시를 끊임없이 읊었다. 또 《능엄경(楞嚴經)》을 좋아하여 심지어 경(經)을 등지고 앉아 외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임종 때 이르러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물리쳐 시끄럽게 떠들지 않도록 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니 활달하고도 참다운 군자(君子)라 하겠다. 아, 함(涵)은 이때 외직으로 홍주(洪州)에 나가 있었으므로 임종을 미처 보지 못했으니 평생에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강화천도 시절 1253 김효인 몰, 1256 김창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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