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金方慶 142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05 (최종준,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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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5 14:31 조회1,646회 댓글0건본문
●동국이상국전집 제19권
찬 贊
최 상국(崔相國) ★종준(宗埈)이 낭중 정홍진(丁鴻進)에게 묵죽(墨竹)을 그리게 하고 나에게 찬 2수를 지어 좌우에 써주기를 청함
물건의 형태를 그리는 데는
실물 그대로 되어야 귀하나니
못하면 부족하고
낫게 되면 지나치네
공이 간직한 묵죽(墨竹)은
완연히 서로 비슷하여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니
진가를 구별하기 어려워라
줄기 하나가 바로 솟아올랐는데
높지만 그다지 쳐들지 않았고
두어 포기가 옆으로 뻗었는데
낮지만 그다지 처지지 않았네
이것을 그림이라 생각한다면
붓 간 흔적이 조금도 없는 듯하고
거울에 비친 대라 의심한다면
그림자이지 그림은 아니고
그림자라 생각한다면
병풍이지 거울은 아닐세
아마도 조물주와 통한 것이니
마음대로 변화를 부린 것이리라
공은 대의 절조를 지녔으니
공의 덕은 깊도다
그림은 정홍진(丁鴻進)에게 그리게 하고
찬은 나더러 지으라 하네
어짊은 본디 상대가 없고
오직 대만이 비슷하리라
어진이만이 어진 것 알 수 있으니
공은 홀로 대에 뜻을 붙인 것이네
어찌하여 대를 직접 심지 않고
그림으로 이것을 가지려 하오
진실로 실물과 다름없다면
이것이 바로 대가 아닌가
애써서 그것을 재배하느니보다
앉아서 얻는 것이 낫지 않은가
형태는 그렇다 할 수 있으나
소리는 어디서 나오겠는가
한 번 보면 우수수
바람이 이는 듯하네
가만히 마음으로 들어보게나
구태여 귀로만 들어야 되나
묻노니 이런 말 누가 하던가
허심탄회한 군자라
정공(丁公)의 솜씨가 아니었다면
대가 이렇게 될 수 없고
공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그림 또한 가치 없으리
대는 손에 의해 나타났고
그림은 눈에 의해 귀해졌네
교한 것으로 교한 것 찾으니
잘도 서로 만났네
●동국이상국후집 제12권
서 書
잔치에 참석케 한 데 대해 최 상국(崔相國) ★종준(宗峻)에게 사은하는 편지
도읍을 옮기던 해주D-001에 죽었다.
다음처럼 모(某)는 머리를 조아리고 상국(相國)에게 글을 올립니다. 모(某)는 어제 부름을 받고 영광된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밤에 수레위에 쓰러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한 은혜 깊이 명심하는 바입니다. 다만 취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미치광이의 옛 태도가 다시 발작했던걸까요?
옛 서울에서 여기로 옮긴 이후로는 사대부집들이 창졸간에 술을 빚을 겨를이 없으므로, 웬만한 술을 어쩌다가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만, 좋은 술은 아예 바랄 수조차 없는 실정이온데, 상국께서 주신 술은 독하고도 맛이 있었으니, 비록 백일 동안에 아홉 번 빚은 술이라 할지라도 그 술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술에 익숙하지 못했다가 이와 같은 술을 마셨으니, 취하지 않으려 한들 취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한 관현(管絃)의 소리와 같은 것도 이 땅에서만 들어보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어디서나 들어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연전 폄류(貶流)된 이래로 관현의 소리라고는 들어보지 못하여 우울한 심정을 달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전에 갑자기 생가(笙歌)와 소적(簫笛)의 우렁찬 소리를 듣게 되니……원문 2자 빠짐……비록 냉담한 서생(書生)일지라도 목석 같은 심장이 아닐진댄 그 소리를 즐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관현은 모두가 품질이 뛰어나고 불러온 악관들도 모두가 한때의 명수였으니, 어찌……원문 1자 빠짐……들리고……원문 1자 빠짐……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성악(聲樂)에 대해서 비록 공부한 일은 없습니다마는 천성이 본래 성악 듣기를 좋아하므로 그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들먹거렸으니 가소롭습니다.
상국께서는 저에게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것을 먹여 주시고 또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 주시어 매우 즐겁게 해 주셨으니, 평생에 처음 흥겨운 일로 아마 후일에는 저번 날과 같은 때가 없을 듯합니다.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석으로 축수할 뿐입니다.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아 머리가 무겁고 손이 떨려서 편지가 소략하니 매우 황공하옵니다……
[주 D-001] 도읍을 옮기던 해 : 1232년(임진) 즉 고려 고종 19년 7월에 몽고의 침략으로 인하여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겼다. 당시 이 상국은 6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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