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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46 ---최자의 보한집 02 <임유, 금의, 김창, 김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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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6 14:09 조회2,0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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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한집(補閑集) 上11(범우사 사르비아총서 208권, 33쪽)

양숙공(良淑公) 임유(任濡)의 문하생은 네 번 과거에 급제했다.
문정공(文正公), 문안공(文安公), 문순공(文順公)과 한(韓), 진(陳)의 두 추밀(樞密), 사성(司成) 유충기(劉沖基)와 아경(亞卿) 윤우일(尹于一)은 같은 나이로서 급제했으며,

평장(平章) ★김창(金廠), 추밀 이중민(李中敏), 복야 최승선(崔承宣)은 형제로서 급제했다. 왕이(王?), 김규(金珪), 갈남성(葛南成) 등 세 명의 경(卿)은 또한 운치(韻致)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모두 같이 급제했고,

오늘날의 참지정사(參知正事) 최인(崔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홍균(洪鈞),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 손변, 추림원사(樞密院使) 조수(趙脩), 우복야한림학사(右僕射翰林學士) 윤유공(尹有功), 형부상서학사(刑部尙書學士) 송국첨(宋國瞻), 병부상서학사(兵部尙書學士) ★김효인(金孝印), 좌간의대부위위경(左諫議大夫衛尉卿) 하천단(河千旦), 그리고 나(◀최자) 자신까지 모두 영렬공(英烈公 ◀금의)이 관장했던 과거에 급제했으니 세인(世人)이 번성한 문하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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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숙공은 의종 명종 신종 3대에 걸쳐 국구(國舅)가 되었고 그의 직위는 재상에까지 올랐으니, 그의 문하생 조문정공(趙文正公 ◀?조충)이 벼슬이 사성이 되어 과거를 열게 되었는데, 그의 새로운 문하생을 데리고 양숙공을 찾아 인사를 드렸더니 이인로(李仁老)가 이를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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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숙공의 아들인 평장사 경숙(景肅)은 네 번이나 과거를 관장하였더니 몇 해 동안 10여 인의 문하생을 관직에 오르게 하였다. 이들 가운데 세 명의 장군과 한 명의 낭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일찍이 못 들어 본 일이었다.





경문공(景文公) 최홍윤(崔洪胤)이 금방(金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政堂)을 제수받아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갔는데 숙직하는 방이 제 번째 방에 있었다.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가 또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을 제수받고 곧이어 그 방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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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공과 금공이 다같이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문하생으로 장원이었고 그 뒤 임신년 봄에 같이 예조에서 시관(試官)으로 있었는데, 나(◀최자)도 또한 그의 문하 출신이었다.

두 분은 동시에 재상이 되었는데 충숙공의 아들인 유필(惟弼)이 또한 그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영열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 휴양할 적에 그 문하생들이 축수하려고 큰 잔치를 베풀고 겸하여 최(崔), 문(文) 두 재상을 초대하여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영렬공이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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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공과 영렬공이 다같이 재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와서 휴양하는데 상감께서 세자를 책봉하고 별전에 나와서 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두 분은 모두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여러 문하생들이 부축하여 대궐로 들어가니 거리를 메우고 골목에 가득찬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며 감탄하였다.

잔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영렬공은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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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동안의 동방급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고 여러 자손들을 불러내어 앉히려고 할 때 말하기를,
"같은 문하(門下)의 제자들은 정이 골육과 같은 것이니 내 여러 자손들도 또한 자네들과 같은 형제들이다." 라 하고 나이대로 앉혔다.

취흥이 무르익고 기쁨이 한창일때 문하생들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주고받으라 하니 동년 중 윗자리인 황보관(皇甫瓘)이 부르기를,
"동년(同年)여 선후(先後)로써 형제가 되었네." 하였는데,
공(公)이 즉시 그 말을 받아 답하여,
"자리에 가득찬 영웅 속에 자손이 끼었구나." 라고 하였다.

이튿날 동년들이 각기 시를 지어 답례하여 내(◀최자)가 공의 시 7자를 나누어 운자를 만들어 시와 인(引)을 지어 답례하였더니 공이 그것을 보고 쾌히 좋아하였다.





금방(金榜) 세 번째 사람인 정당(政堂) ★김창(金敞)은 진양공 문하의 상객(上客)으로서 날마다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나라를 돕는 것을 그의 직책으로 삼았다. 곧 재상에 오르고 해마다 과거를 관장(管掌)하였다.

같은 해에 진사였던 ★한유선(韓惟善)도 같은 문하에서 과거에 올랐다. 이해 동지(冬至)에 상주목사가 축하하여 쓰기를,

"백의로 성균관 시험에 올라 같은 방이었는데, 지금은 어찌 문생이며, 청삼(靑衫)으로 진양의 객이 되어 공은 공과 같은 때에 상국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오늘날 여러 고을의 목사들이 쓴 축하 글에는 옛 것을 모방한 글이 많으나, 이 상주목사의 축하 글에는 하나도 모방한 것이 없이 사실대로 썼는데 다만 말이 원만하지 못하여 익숙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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