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146 ---김창 김효인 과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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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6 14:11 조회1,390회 댓글0건본문
金敞(김창, 충렬공 伯父) 선조님은 고려 고종24년 1237년 <국자감시>에서, 그리고 고종29년 1242년 <예부시>에서, 그리고 金孝印(김효인, 충렬공 父) 선조님은 고려 고종37년 1250년 <예부시>에서 과거시험을 주관하신 기록이 고려사 및 증보문헌비고에 보이고 있습니다.
충렬공(김방경)께서 삼별초 반적들을 토벌할때 그중 이행검 이라는 자가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는 기록도 고려사 등에 보이고 있습니다.
■《고려사》 제73권 - 지 제27 > 선거 1 >
<예부시>
고종(高麗史73卷-志27-選擧1-科目1-039)
29년 4월에 추밀원 부사 ★김창(金敞)이 지공거로 되고 판 예빈성사 설신(薛愼)이 동지 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을과 홍지경(洪之慶)등 3명, 병과 7명, 동진사과 17명, 명경과 2명, 은사과 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37년 5월에 평장사 임경숙이 지공거로 되고 상서좌승 ●김효인(金孝印)이 동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김응문(金應文) 등 29명, 명경과 3명, 은사과 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국자감시>
고종(高麗史74卷-志28-選擧2-科目2-國子試之額-011)
24년 4월 대복시사 ★김창이 시부과에서 오수, 십운시과에서 조희보 등 81인과 명경과 4인을 선발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卷之一百八十五
選擧考2 - 科制2
高麗登科總目
<예부시>
◆(高宗)二十九年★金敞薛愼取進士賜乙科洪之慶等三人丙科七人同進士十七人明經二人恩賜八人及第.
◆(高宗)三十七年任景肅●金孝印取進士賜金應文等二十九人明經三人恩賜八人及第.
<국자감시>
◆(高宗)二十四年★金敞取詩賦吳壽十韻詩曹希甫等八十一人明經四人.
■ 《고려사》 제106권 - 열전 제19 >
이주
〔이행검(李行儉)의 기사 첨부〕
이주는 자(字)가 호연(浩然)인데 금마군(金馬郡) 사람이었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부성(富城)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다가 중앙에 들어와서 도병마 녹사로 되었으며 직사관(直史館)으로 선발되었다가 일이 있어서 관직에서 떨어졌다.
상서(尙書) ★김창(金敞)이 그의 재능을 사랑하여 추천하고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되게 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들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되었다.
원종 때에 병부, 예부의 시랑(侍郞) 및 국자제주(祭酒)를 역임하였고 좌간의대부로 있다가 왕에게 글을 올려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더니 왕이 상서 좌복야, 한림학사, 승지로 벼슬을 올려 주어 치사케 하였다.
그는 충렬왕 4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편지 기타의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생산(生産-이익이 나는 일)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는 쌀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그의 아들은 이행검(行儉)이다.
이행검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주(晋州) 사록(司錄)으로 배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상서 도사(尙書 都事) 겸 직사관(直史館)으로 조동되었다.
여기서 오래 근무하다가 지홍주사(知洪州事)로 파견되어 갔는데 삼별초의 반란 때에 적들에게 붙잡혔다. 적들이 그에게 관리의 선발, 임명 사업을 맡게 하였는데 ★김방경이 반적들을 격파하자 이행검이 그의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의 문생(文生)이 된다 하여 이행검을 살려 주었다. 그 후 청주(淸州), 곡주(谷州-곡산), 풍주(豊州)의 세 고을에서 수령으로 있었는데 청렴하고 정치가 간결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 용어 설명
◆門生(문생) : 고려시대에 과거의 급제자가 고시관을 恩門(은문)이라 부르는데 대하여 그 급제자들을 이르는 말.
자기를 선발해 준 고시관을 스승처럼 여겨 양자 사이에는 座主 門生制가 성립하였으며, 이는 禮部試 뿐만 아니라 國子監試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같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끼리는 同年이라 하여 고시관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고려중기 이후 殿試가 폐지되어 과거에서 고시관의 권한이 강화됨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고려후기로 갈수록 더욱 중시되어 사제관계를 맺는데 그치지 않고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知貢擧(지공거) : 과거의 고시관으로 동지공거의 위이다. 그 과거에서 합격된 자는 이 지공거를 座主 또는 恩門이라 부르면서, 평생 門生의 예를 갖추었다.
이 명칭은 당(唐) ·송(宋)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貢)은 추천하여 보냄, 거(擧)는 뽑아서 씀, 지(知)는 주관하여 본다는 말로서 각 지방에서 추천하여 보낸 선비를 뽑는 주임관(主任官)이라는 뜻이다.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신설하면서 둔 것으로, 처음에는 쌍기를 지공거로 임명한 뒤부터는 문관 1명으로 지공거를 삼아 오다가 일이 번잡해짐에 따라 보좌관으로서 1004년(목종 7)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더 두었다. 얼마 뒤 동지공거는 폐지되었다가 1083년(문종 37) 다시 동지공거 1명을 제도로서 확정시켰다. 광종 ·경종 ·성종 3대의 지공거는 주로 쌍기 ·왕융(王融) 등 귀화인(歸化人)인 한림학사가 임명되었으나, 그 뒤 과거제도가 일반화되면서 고려의 문신들이 이 임무를 맡았다. 1315년(충숙왕 2) 고시관(考試官)으로 개칭하였다가 1330년 다시 지공거로 환원하였다. 또 임금이 친시(親試)할 때에는 시권(試券)을 읽어드린다는 뜻에서 독권관(讀券官)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지공거를 학사(學士)라 부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지공거가 거의 한림학사 중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구제(舊制)에는 과거에 앞서 미리 지공거를 임명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많아 공민왕 때에는 과거 하루 전에 임명하여 폐단을 막아보려고 시도한 일도 있다.
한편,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지공거에 대하여 은문(恩門) 또는 좌주(座主)라 하여 문생(門生)의 예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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