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충렬공 金方慶 146 ---김창 김효인 과거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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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16 14:12 조회1,604회 댓글0건본문
■ 김창, 김효인 형제 문과 급제 기록 (정리)
1) 문간공(휘 敞) 급제 사실
고려 희종(熙宗) 2년(丙寅 1206년) 6월 庾亮才榜(문하시랑 任濡 지공거, 우승선 崔坦 동지공거)의 을과 3인 중 3등으로 급제
보한집 下18에서 “정당(政堂) 김창(金敞)은 금방(金榜) 세 번째로서 진양공(晉陽公=최이) 문하의 상객(上客)이 되어 날마다 어진 사람을 추천하여 나라를 돕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라 하여 을과 3인 중 3등으로 급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상서공(휘 孝印) 급제 사실
고려 희종(熙宗) 4년(戊辰 1208년) 윤4월 皇甫瓘榜(참지정사 李桂長 지공거, 우부승선 琴儀 동지공거)에 급제
영렬공(英烈公)은 ‘금 학사(琴學士)’로 널리 알려진 금의(琴儀)를 가리킵니다. 그 역시 오랫동안 과거를 관장하여 당대를 풍미한 학맥을 형성합니다. 그 위세당당함은 보한집 곳곳에 나타납니다. 최자 역시 영렬공의 문하이기 때문인지 아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선거지에 금의가 과거를 관장한 기록은 3번 나옵니다.
①희종 4년(1208년) 윤4월 참지정사 李桂長이 지공거, 우부승선 琴儀가 동지공거로 진사를 선발하였는데, 皇甫瓘 등 33인, 명경과 6인, 은사 2인이 급제하였다.
②강종(康宗) 원년(1212년) 6월 정당문학 崔洪胤이 지공거, 지주사 琴儀가 동지공거로 진사를 선발하였는데, 田慶成 등 29인과 명경과 6인이 급제하였다.
③고종(高宗) 원년(1214년) 5월 첨서추밀원사 琴儀가 지공거, 우산기상시 蔡靖이 동지공거로 진사를 선발하였는데, 金莘鼎 등 22인, 명경과 5인, 은사 3인이 급제하였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상서공 할아버지께서는 희종 4년에 皇甫瓘榜으로 급제하시어 관계에 진출하신 것이 확인됩니다.
이처럼 문간공 할아버지에 뒤이어 상서공 할아버지께서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시니 최자(崔滋)는 “평장(平章) 김창(金廠)...은 형제로서 급제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상서공(김효인) 선조님께서는 여러 기록에 나와 있듯이 영열공 금의(琴儀, 1153-1230) 를 스승으로 모시고 문장과 서예에서 한 시대에 걸출하여 [금학사 옥순문생]이라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경기체가의 하나인 [한림별곡]에 금학사 옥순문생이 나오는데, 상서공(김효인)의 휘자는 보이지 않으나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병려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맞추어 내려간 글. 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 해의(解義). 김양경의 시와 부 등과 함께 금학사 옥순문생이라 불리워졌으리라 생각됩니다.
---1224년 (경북 포항)보경사 원진국사비는 이공로 撰, 김효인 書하여 세웠으며, 1235년 (전남 강진)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전면은 이규보 撰, 김효인 書하여 세운 것이다.---
■ 안동김씨 족보
孝印
공은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니,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인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 둔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름이 사림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 디지털한국학
금의(琴儀)
1153(의종 7)∼1230(고종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초명은 극의(克儀), 자는 절지(節之). 삼한공신(三韓功臣) 용식(容式)의 후예이다. 어려서 학문에 힘써 글짓기를 잘 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 청도의 감무로 나갔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하였다.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보직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를 구할 때 이종규(李宗揆)의 추천으로 발탁되자 신임을 얻어 화요(華要)의 직을 거치고, 신종 때에 상서우승 우간의대부 태자찬선대부(尙書右丞右諫議大夫太子贊善大夫)가 되었으며, 한때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희종 때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 등을 지냈다.
1212년(강종 즉위년)왕의 즉위에 대한 책명사의 접대에 공을 세우고 첨서추밀원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院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1215년(고종 2)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修國史),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220년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 翰林別曲》에는 금학사(琴學士)로 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 인터넷 검색
⊙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원?문 인노시 공노 륙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니졍언 딘한림 솽운주필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鏡詩賦
튱긔 광균경의 량경시부
위 試場ㅅ 景 긔 엇더니잇고
시? 경
(葉)琴學士의 玉筍門生 琴學士의 玉筍門生
금학사 옥?문 금학사 옥?문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현대어 풀이>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병려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맞추어 내려간 글.
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 해의(解義). 김양경의 시와 부
아아, 과거 시험장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참으로 굉장합니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아아, 나를 위시하여 몇분입니까?(참으로 많습니다.)
제1장은 문장가, 시인 등의 시부(詩賦)를 나타낸 것으로, 명문장을 찬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과시(科試)의 고시관이었던 금의(琴儀)에 의해 배출된 많은 제자들의 시(詩), 부(賦)를 찬양함으로써 신진(新進) 사류(士類)들의 당당한 기개를 엿보는 듯하다. 특히, 끝 구절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는 자만에 넘치는 기개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상층 문인들의 의식 세계를 엿보는 듯하다.
■ -한국의 한시 2- 白雲 李奎報 詩選 (1986년 1쇄, 2003년 5쇄, 허경진 옮김, 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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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종 3년(=1215년) 5월로부터 약 1년 반 동안에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지어졌다. 나라에서는 새로 급제한 사람을 위하여 학사연(學士宴)을 열거나 추천희(秋千戱)를 열어 주는 것이 향례였다. 이때 금의(琴儀)의 문생 중에서 (고려시대에는 문인이 知貢擧가 되어 과거에서 급제를 뽑으면 바로 지공거의 문생이 되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별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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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문인들의 시장경(試場景)의 서술이다. 당시 이규보가 정언 벼슬에 있던 때이고, 진화 가 고종의 사부(師傅)이면서 한림으로 있을 때였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김동욱 단국대 교수)가 <한림별곡의 창작연대> 에서 고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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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사 옥순문생 중의 한 사람 김효인
고려 희종(熙宗) 4년(戊辰 1208년) 윤4월 皇甫瓘榜(참지정사 李桂長 지공거, 우부승선 琴儀 동지공거)에 급제
①희종 4년(1208년) 윤4월 참지정사 李桂長이 지공거, 우부승선 琴儀가 동지공거로 진사를 선발하였는데, 皇甫瓘 등 33인, 명경과 6인, 은사 2인이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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