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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과 김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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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28 05:33 조회1,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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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定本 朝鮮漢文學史 (1931.12월 김태준 지음, 2003.8월 최영성 교주, 심산)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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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농림을 졸업한 1926년, 그(=김태준)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하였다 (支那語支那文學 전공). 재학중에는 ‘천태산인(天台山人)’ 이라는 필명 겸 아호로 <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를 연재하여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사회주의 관계 서적을 읽는 독서서클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1년 3월 9일 대학을 졸업하고, 곧이어 조윤제, 이희승, ★김재철, 이재욱, 서두수, 이숭녕, 방종현 등 선후배 동학들과 함께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를 결성한 뒤 3년간 회보를 펴냈다.

1934년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국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식민지하의 조선에서 조선어를 비롯한 민족문화가 멸절(滅絶)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더욱 열정적으로 국학의 연구와 발전에 노력했다.

한편, 1931년 경학원(經學院) 직원(直員)이 되었다가 1935년 3월부터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 강사가 되고 이어 명륜전문학원 강사, 조교수를 지냈으며, 1939년에는 일본인 교수 다카하시 도오루(1878-1967)의 후임으로 경성제국대학 강사 (조선문학 담당)로 취임하였다.


p.320
조선어문학 방면으로는 경성제대 제1회 출신인 조윤제, 제2회의 이희승, 제3회의 ★김재철, 이재욱, 제5회의 방종현, 이숭녕, 제6회의 고정옥(월북), 제8회의 구자균, 제12회의 신구현(납북) 등이 있었고, 조선사학 방면으로는 제1회의 신석호, 제2회의 윤용균(1903-1931)이 있었으며, 그 밖에 조선미술사의 고유섭(2회)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도 조선어문학을 전공하면서 조선민속 - 특히 연희(演戱)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던 ★김재철(1907-1933)과는 관포지교(管鮑之交) 또는 지음(知音)이라 일컬을 정도로 교의(交誼)가 깊었다. 김재철이 27세로 요절하자 경성제대 졸업논문으로 제출했언 <조선연극개관(朝鮮演劇槪觀)>을 ‘조선연극사’ 라는 제목으로 출판해 준 사람이 바로 김태준이었다.32) 김태준과 김재철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성제국대학 졸업대장(卒業臺帳)에도 재적번호가 216, 217번으로 기록될 정도로 언제나 붙어다녔었다. 성격을 보면, 김태준은 침착하고 말수가 적은 반면, 김재철은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편이었으며 재담에 뛰어나 늘 좌중을 압도하였고 즐겁게 하였다 한다.

경성제대 졸업부를 보면, 재학시설 김태준은 김재철에 비해 전공과목에 치중한 듯하고, 김재철은 조선문학은 물론 조선학 전반, 나아가 외국문학까지 학점을 이수하였다. 학점은 전공에 치중한 김태준이 훨씬 나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학점 평가는 우(優), 양(良), 가(可)의 기본 3단위에다 각 단위를 ‘+(1.0)’dgj '-(0.5)'로 세분하여 모두 6단위로 되어 있었는데, 김태준은 김재철보다 성적이 좋아 우, 양이 많은 편이다.

32) 김태준, [조선연극사 서] : 서항석, [조선연극사서평], <동아일보>, 1933년 6월 24일자.
참고] 정형호, [김재철의 ‘조선연극사’ 연구], <한국민속학> 제28호, 민속학회, 1996.


p.300
4) 放浪詩人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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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삿갓 아래로 본 세계를 골계(滑稽), 해학, 풍자 등 여러 법과 파격시(破格詩), 시희(詩戱), 자희(字戱) 등으로써 이를 음파(吟破)해 버렸다. -실례(實例)는 생략. 280)

280) 原註 : “이 절은 이미 ★金在喆 군의 발표가 있었으므로 이에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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