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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63 ---이제현의 익재난고 04 (정방, 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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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30 13:33 조회1,3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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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전집
전집 1
역옹패설 전집 1 ?翁稗說 前集一

이부(吏部)는 문관의 선발을 맡고 병조(兵曹)는 무관의 선발을 맡는데, 그 선발된 자의 출사(出仕) 연월의 순서를 매기고, 그 노일(勞逸 편안하고 수고로움)을 구분하며, 공과(功過)를 기록하고, 그 재능의 위무를 구체적으로 문서에 기재하니, 이것을 정안(政案)이라 한다.
이 정안을 가지고 중서성(中書省)에서 승진시킬 것과 강등시킬 것을 적어 올리면, 문하성(門下省)에서는 제칙(制勅)을 받들어 시행하니, 이것이 국가의 법으로서 대개 중국의 법과 같다.
그런데 ★최충헌(崔忠獻)은 임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항상 부중(府中)에 있으면서 그 요좌(僚佐)들과 함께 제멋대로 정안을 가져다가 벼슬에 제수할 후보자를 주의(注擬)하여, 자기의 무리인 승선(承宣)에게 주어 그 승선으로 하여금 왕에게 아뢰게 하면, 왕은 부득이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충헌의 아들 이(怡)와 손자 항(沆), 항의 아들 의(誼) 4대가 정권을 잡아 이런 관습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인사(人事) 사무에 관한 승선을 정색승선(政色承宣)이라 하고, 요좌(僚佐)로서 이 일을 맡은 3품인 자를 정색상서(政色尙書), 4품 이하를 정색소경(政色少卿)이라 하며, 필기구를 가지고 그 밑에서 종사하는 자를 정색서제(政色書題)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는 곳을 정방(政房)이라 이르니, 이는 곧 부중의 사칭(私稱)인 것이다.
평장사(平章事) 금의(琴儀)ㆍ수상(首相) ★김창(金敞)ㆍ상서(尙書) 박훤(朴暄) 등 여러 명사들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진출하였는데, 당세에서는 이를 영광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할 것인 줄 알지 못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이 ★최의(崔誼)를 베고 정권을 왕실(王室)로 돌렸으나, 그 정방은 없애지 아니하여 왕실의 중임(重任)을 권문(權門)의 사칭을 그대로 인습하여 부르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덕릉(德陵) 초년에 정방을 없애고 문무 백관의 전선(銓選)을 선총부(選摠部)에 위임하여, 수상(首相)과 아상(亞相)이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거의 옛 제도를 회복할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 전선에 익숙한 한두 심복에게 다른 벼슬을 겸직시켜 오래도록 바꾸지 아니하므로, 염치없는 우둔한 자나 승진에만 급급한 경박한 무리들이 기회를 타고 그 잘못을 답습하여 왕을 속이고 자기를 봉(封)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려는 아름다운 뜻이 한갓 형식에 그칠 뿐이었으니, 이 또한 통탄할 일이다.
이같은 일이 의릉(毅陵 충숙왕(忠肅王))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나날이 더 심하여, 붉은 인(印)을 찍어 봉함한 정안(政案)이 한낱 환관의 수중에서 멋대로 변경되기도 하니, 흑책정사(黑冊政事)라는 비방이 아녀자들 입에까지 퍼졌다.
《좌전(左傳)》에,

"세금을 박하게 거두어들이도록 법을 만들어도 오히려 탐하는 폐단을 초래하는데, 세금을 탐하게 징수하도록 법을 만드니 그 폐단이 장차 얼마나 클 것인가."
하였으니, 그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랴. 아이들이 두꺼운 종이에다 먹칠을 하고 기름을 먹여서 글씨 연습하는 것을 흑책(黑冊)이라 한다. 의릉(毅陵)이 봉자산(奉子山) 이궁(離宮)에 있을 때, 병으로 외인 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안팎이 막혔었다. 일을 맡은 자들은 모든 비목(批目)이 내리면, 서로 다투어 뭉개고 지우고 하여, 주묵(朱墨)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흑책정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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