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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金方慶 165 ---이제현의 익재난고 06 (이제현의 부 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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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9-30 13:37 조회1,6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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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先君 이진(李?))이 《산곡집(山谷集)》을 열람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과거 강도(江都)에 있을 적에 선달(先達 문무과에 급제는 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 이담(李湛)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심악군(深岳君)과 우연히 이름이 같았다. 있었는데, 시를 지으면 말이 엄격하고 뜻이 참신하였으나 인용하는 고사(故事)가 험벽(險僻)하여, 당시의 숭상하는 바에 배치되었으므로 마침내 드러나지 못하였다. 대개 부옹(?翁 황정견(黃庭堅)의 호)의 시체(詩體)를 공부하여 너무도 똑같게 된 사람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고심(苦心)하여 학문을 닦은 선비로서 요직에 있는 사람의 인정을 못 받아 늙어 죽도록 드러난 이름없음이 이 선달(李先達)과 같은 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정말 애석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당(唐) 나라 양사복(楊嗣僕)이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고향 집에서 그의 아버지 복야공(僕射公 양어릉(楊於陵))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때의 좌객(座客)이었던 양여사(楊汝士)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천자 곁에서 문장으로 성가 빛낸 지 오래더니/文章舊價留鸞掖
이정에 도리의 그늘이 새롭구나주D-029/桃李新陰在鯉庭
오대(五代) 때에 마예손(馬裔孫)이 문생을 이끌고 와서 좌주(座主)주D-030 배고(裵?)의 집에 가 뵈니, 배공(裵公)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세 번 시관(試官)을 맡았던 팔십 먹은 늙은이가/三主禮?年八十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 남을 보는구나/門生門下見門生


우리나라에서는 시관(試官)이 된 자를 학사(學士)라 부르는데, 그 문생이 그를 은문(恩門)이라 부른다. 문생과 좌주 사이의 예(禮)가 옛날보다 더욱 중하여져서, 학사의 아버지나 좌주가 살아 있으면 방방(放榜)한 다음에는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가서 뵈는데, 문생이 줄지어 수행(隨行)한다. 당도하여 학사가 문으로 나아가 절을 하면 문생은 그의 뒤에서 절을 하는데, 많은 빈객 가운데 비록 존장(尊長)일지라도 모두 마루에서 내려와 뜰에 서며,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려 읍양(揖讓)하고서 올라가 차례대로 배하(拜賀)한다. 그리고 나서 학사가 자기집으로 맞이하여 잔을 올리고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데, 이는 대개 양사복과 배고의 고사(故事)를 본받은 것이나, 예문(禮文)이 그보다 지나쳤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1320)에 내가 외람되게 고시관(考試官)이 되었을 적에 ★선군(先君)은 연세가 77이었고 대부인(大夫人)은 연세가 70으로 모두 강녕(康寧)하셨으며, 지금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호) 정승 권공(政丞權公)은 내가 등과(登科)할 적에 지공거(知貢擧)였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열헌(悅軒 ★조간의 호) 조공(趙公) 이름은 간(簡)이다. 이었으며, 성균시(成均試) 때의 시관(試官)은 상헌(常軒 정선의 호) 정공(鄭公) 이름은 선(?)이다. 이었는데 세 분 좌주(座主)도 모두 건강하였었다.
이에 두루 찾아 뵙고서 초청(招請)하였는데, 나는 또 국재공의 사위였으므로 변국대부인(卞國大夫人)의 견여(肩與 교자(轎子))도 왕림하니, 사람들이 과거(科擧)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윤저헌(尹樗軒 저헌은 윤혁의 호) 혁(奕) 이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잔치 벌여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一宴共歡三座主
나란히 술잔 올려 어버이에게 축수하네/四觴齋壽兩家尊
앞뒤로 길 물리고 선관주D-031 옹위하여 오고/讓前讓後蟬冠擁
남쪽과 북쪽에서 봉개주D-032가 달려오네/迎北迎南鳳蓋奔
6년 뒤에 국재(菊齋)의 맏아들 정승(政丞) 길창군(吉昌君) 또한 지공거가 되었는데, 부모를 모시고 경축(慶祝)하는 자리에 형제와 생질(甥姪)과 사위들이 모두 고관 귀척(高官貴戚)이 되어 앞뒤에서 부옹(扶擁)하니, 광채가 길에까지 가득하였다. 윤공(尹公)이 또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성대한 일로 큰 거리 화려하게 꾸몄고/盛事粧成九街?
아름다운 이야기로 온 장안이 밤가는 줄 모르네/美談挑盡萬家燈
사람 가운데 생불(生佛)이라 말하지 않는 이 없으니/無人不道人中佛
늙은 정승을 말함인가 젊은 정승을 말함인가/老政丞耶小政丞
당시의 일을 잘 묘사하였다.
★선군(先君)은 3형제분이었는데, 조모(祖母) ★김씨(金氏)의 성품이 근엄하시어 몸소 서사(書史)를 가르치셨으며, 백부(伯父)와 계부(季父)는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고 ★선군만이 연세 80에 이르렀는데, 자질(子姪)들을 교양(敎養)하여 세업(世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백부의 아들은 내서사인(內書舍人) 전(?)인데, 성균시(成均試)와 대과(大科)에 모두 장원(壯元)하였으며, 그 아우는 덕원목사(德原牧使) 규(?)이다.
계부의 아들은 지금 첨의평리(僉議評理)인 천(?)인데, 나의 가형(家兄) 이암공(怡庵公) 및 나와 함께 모두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었으므로 민묵헌(閔?軒 묵헌은 민지(閔漬)의 호)이 ★선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꽃봉오리 세 집에 다섯 장원 났으니/華?三家五榜魁
사람들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人言皆是謫仙才
참으로 공의 적선(積善)에 짝할 이 없음을 알겠도다/知公積善眞無敵
해마다 그대만이 경축연을 여니/獨見年年慶席開
내서(內書)는 아들이 없고 덕원(德原)의 아들은 아직 급제(及第)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평리(評理)의 아들 달중(達中)ㆍ배중(培中)과 나의 둘째아들 달존(達尊)만이 등과(登科)하였는데, 달존은 학문(學文)을 좋아하여 자못 시배(時輩)의 추허(推許)를 받았었으나 30세도 못 되어 죽었다. 늘 후사(後嗣)의 어려움을 생각할 적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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