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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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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08 22:59 조회1,4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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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504년 갑자사화

이해 1504년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 권주(權柱) : 1457(세조 3)∼1505(연산군 1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이(邇)의 아들이다. ---1504년 윤4월 정축일에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그달 경진일에 사사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 등의 “권주는 그 당시에 주서로 단지 승지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는 계(啓)에 따라 사형을 면하고 장형(杖刑)을 받은 뒤 평해(平海)로 귀양갔다.


7. 어머니 상중에 정승에 제배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연산 때 판의금으로 있었는데 형벌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적었다. 그가 추관(推官)으로 있으면서 너그럽게 조처하기를 힘써 공의 힘으로 살아난 이가 많았다. 병인년에 계모 상을 당했는데, 그때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복제 기간이 끝나고 우찬성으로 불려 들어가니, 어머니 상에 정리를 다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여겼다. 7월에 정승이 되었다.

◇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주B-001 寒竹堂涉筆上 상신(相臣) 삼백일 인
---상중에 정승에 제배된 자가 2인인데, 연산조의 ★김수동(金壽童), 인조조의 장유(張維)이다.


8. 1506년 중종반정

이때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

반정 초에 공에게 우상으로 기복(起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말하기를, “신과 신의 아우 병조 참의 수정(壽正)이 지난 달에 친모 상을 당했을 때 〈연산 당시의〉 단상법(短喪法)으로 상복을 벗고 봉직해 왔는데 지금 새로운 시대를 당하였으니,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게 해줍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부ㆍ육조에 명하여 상의하게 하였더니, 유순(柳洵) 등이 말하기를, “국정 개혁 초에 경륜과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 수동(壽童)이 없으면 안 되겠으니, 선조(先朝)에서 기복하던 법에 따라 정무에 종사케 하고, 수정은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중종(中宗)이 “옳다.” 하고 조금 있다 좌상으로 승진시켰다. 《국조보감》

의거(義擧)하던 날, 성희안(成希顔)이 그 집으로 가서 알리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살피고 헤아린 뒤에 행동하므로 사림(士林)들이 모두 그의 도량을 탄복하였다. 《음애잡기(陰崖雜記)》

좌의정 김수동 등이 육조참판 이상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왕에게 아뢰기를, “의거 때에 먼저 신수근(愼守勤)을 죽인 것은 큰일을 성공하려고 하여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대궐에 들어와 임금을 모시고 있어 인심이 위태롭고 두려워하니, 청컨대, 은정(恩情)을 끊고 내어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바는 심히 당연하나, 조강(糟糠)의 처(妻)를 어찌 하리오.”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짐작한 바이오나 종사(宗社)의 큰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쾌히 결단하여 미루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헤아리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을 것이오.” 하였다. 그 날 밤으로 곧 신씨는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나가 머물게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연산을 폐할 때에 성희안(成希顔)이 우상 김수동의 집으로 가서 알리니 우상이 말하기를, “이러한 나라의 큰일을 나는 처음에 그 전말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을 따라 뛰어갈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곧 베개에 누우면서, “그대는 내 목을 잘라 가라.” 하였다. 성공(成公)이 대군(大君)을 세운다는 뜻을 아뢰니, 우상이, “그렇다면 내가 가야겠다.” 하였다. 〈언행록(言行錄)〉에서 나옴


◇ 정국공신(靖國功臣) : 1506년(중종 원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중종반정을 이룬 공으로 책록함. 2등 金壽童(익), 3등 金壽卿(익), 4등 金,石武(김무, 익), 원종 金百鈞(분파?)

◇ 동생 김수경(金壽卿) : ---1506년 병조참지에 올랐다. 그해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형인 수동의 뒤를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으나,

◇ 金彦默(김언묵) : 1472년(성종3)--1506년(중종1). 자는 우경(愚卿). 공은 혼조(昏朝:중종반정이 일자 연산군때 좌의정이었던 이모부 신수근(愼守勤)과 매제인 감역(監役) 정세명(丁世明)등이 살해 됐던 일)로 인해 공은 권세가들의 친척이라 하여 은둔불사함. 향년 35세.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사위 이문건, 孫子 충갑 효갑 제갑, 外孫子 신윤록 문과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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