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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 06---김공망(金公望, 1482∼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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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30 08:59 조회1,48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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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망(金公望, 1482∼15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수(渭수). 오위 부장(五衛副將) 김성(金城, 1451~1487)의 세 아들 공량(公亮), 공석(公奭), 공망(公望)중 막내 아들로 1482년 태어났다. 어머니는 임치(任治)의 딸로 예조 판서(禮曹判書) 성현(成俔)의 외손녀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이(1487년, 6세)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나 스스로 힘써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1506년(연산군12) 별시(別試) 정과12(丁科12)로 문과(文科)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ㆍ주서(注書)가 되었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가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ㆍ공조 좌랑ㆍ형조 좌랑ㆍ호조 좌랑ㆍ예조 좌랑ㆍ병조 좌랑 등 육조(六曹)의 낭관(郎官)과 이어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 사헌부 · 사간원의 요직인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1년(중종6) 조강(朝講)에서 지평 김희수(金希壽)와 정언 김공망(金公望)이 용관의 도태와 소격서 혁파를 아뢰었다.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있다가 들어와 공조 정랑이 되었다가 형조 정랑ㆍ예조 정랑으로 바뀌었고, 1515년(중종10) 김희수(金希壽)는 장령으로, 김공망(金公望)은 사헌부 지평으로 되었다. 조강에서 지평 김공망이 강릉의 풍속과 사치를 금하도록 아뢰었다. 훈련원(訓練院)ㆍ봉상시(奉常寺)ㆍ상의원(尙衣院)ㆍ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 사복시(司僕寺)ㆍ선공감(繕工監)의 부정(副正)을 거쳐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였다.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자시정(   )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1517년(중종12) 조카 김주(당시 6세)가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기특하게 보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처음에 공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북당(北堂)을 지어 봉양(奉養)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였었는데, 공의 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체직(遞職)되어 봉양하다가 떠났으므로, 공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그 가까움을 기뻐하며 정성을 거의 다하려다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가 모시며 보살피다가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바로 1521년(중종16)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면서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1523년(중종18)에 상복(喪服)을 벗고 군자감(軍資監)과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1526년(중종21) 목사 김공망(金公望)이 해주 객관을 개축하면서 부용당(芙蓉堂, 황해도청 뜰에 있는 海西 8경의 하나)을 연못 안에 지었다. 연꽃이 활짝 피는 여름에는 그 淸楚한 모습이 물에 비치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공의 사람됨이 강직하여 지조를 굳게 지켜 구차히 화합하지 않아서 세속을 따라 그들이 하는 대로 순종하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그가 서로 허여하는 자는 반드시 명망이 있기가 참찬(參贊)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 같은 분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돌아와 1528년(중종23) 7월 계미일(癸未日)에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春秋)가 47세였다. 9월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사곶(蛇串)의 임좌 병향(壬坐丙向)의 터에 장사 지냈다. 

     둘째아들 장예원사평 현풍현감 김이가 상복을 입은 채 오래 알고 지낸 송인(宋寅)에게 묘갈문(墓碣文)을 청하여 송인(宋寅)이 가장(家狀)을 추려서 명문(銘文)을 지었다. 김이가 슬퍼하며 글씨를 쓰고 전(篆)하여 1569년(선조2)에 묘갈을 세웠다.<대동금석서 기록 : 김이 書, 김무 篆>

     그때 세운 묘갈은 잃어 버렸으나, 2003년 4월 후손가에서 새로 세웠다. 묘는 남양주 퇴계원면 퇴계원리 山74-1 사곶(蛇串)에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조선문과방목>, <이암집>(송인), <국조인물고>, <대동금석서>, <우암집>(김주), <임하필기>(이유원), <황해도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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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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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