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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 완결 - 박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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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4-11-06 06:23 조회1,60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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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김방경도 귀국해 첨의중찬 상장군 판감찰사사에 복직했다. 그동안 찬성사 판전리사사 유경이 수상으로 있었는데 다시 김방경이 수상이 된 것이다. 얼마 뒤 유경이 은퇴하자 김방경은 판전리사사도 겸직했다. 원래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기구였으나 이 시기에 김방경 등 재추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기구로 변했고 명칭도 도평의사사로 바뀌었다. 김방경은 이곳에서 다른 재추들과 함께 측근들의 불법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측근들과 상당히 대립되었다.

원래 경기8개의 현의 토지는 관료들의 녹과전(祿科田)으로 지정된 곳이었으나 측근들이 사패를 받아 점유했으므로, 1279(충렬왕 5) 김방경은 도병마사를 통해 모두 녹과전에 충당해야 한다고 청해 허락을 받았으나 송분(宋?)등 측근들의 반발로 무효가 되었다. 응방의 운영과 관련된 대립은 더욱 심했다. 도병마사는 응방의 불법적 형태 때문에 여러 차례 그 폐지를 건의했지만 윤수(尹秀) 등 측근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응방을 공식화해버렸다. 게다가 1280(충렬왕 6) 원나라 사신 탑납이 고려에 들어오다가 응방의 폐해를 보고 비판하자 김방경 등 재상들이 그 폐해를 없앨 것을 건의했으나 충렬왕은 극렬히 거부했다.

이러한 측근들의 폐단이 계속되는 가운데 원나라 사신 야속달(也束達)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중앙에서 파견할 별감들의 폐단을 재추에게 말하므로 그제야 김방경이 아뢰어 정역별감 이영주, 안렴사 귄의 등을 파면했다.

측근정치에 대한 일반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감찰사의 간쟁이 많았는데, 1280년(충렬왕 6) 감찰사의 잡단 진척, 시사 심양, 문응, 전중시사 이승휴 등이 충렬왕이 자주 사냥을 가는 것과 홀치와 응방이 앞 다투어 연회를 여는 것에 대해 간쟁을 했다가 고문과 파직, 유배를 당했다. 『고려사』는 이 때문에 “마침내 언로가 막혔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갈등 속에서 제2차 일본 침략이 이루어졌다. 앞서 충렬왕이 약속한 일이었다. 1280년 전쟁 준비가 급진전되는 가운데 김방경은 69세로서 관행에 따라 사직을 청했으나 충렬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고려는 병선 9백 척, 군사 1만 명, 사공과 수부 1만 5천 명, 군량 ·11막 석등을 확보한 상태였다. 전쟁 준비에 대한 대가로 충렬왕은 역대의 중국왕조와 고려의 관계에서 고려왕이 중국 왕조의 재상에 임명되던 관례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에게 원나라의 재상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원나라의 지배 질서 속에서 고려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세조는 충렬왕을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더하여 고려의 관료들에게도 원나라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김방경은 중선대부 관령고려국도원수에. 박구(朴球)와 김주정(金周鼎)은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에 임명되었고, 그 밖의 고려 관료들도 탈탈화손, 천호, 총파 등의 관직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2차 일본 침략은 혼도 및 홍다구 등과 대등한 지위를 가진 고려 지배층의 참여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김방경은 다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대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쿠빌라이에게 상당한 환대를 받았다. 1281년(충렬왕 7) 원정을 하례하는 의례에서 김방경은 4품 이상만 전(殿)에 올라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쿠빌라이는 김방경을 승상 다음 자리에 앉히고 특별히 음식을 내려주었다. 사흘간 잔치를 벌이고 돌아올 때 활, 화살, 칼, 백우갑옷을 주었고, 활 1천, 갑주 1백, 군복 2백을 주어 동정(東征)에 참여하는 장사들에게 나눠주게 했으며, 동정을 위한 전략 전술을 보여주었다. 김방경에 대한 쿠빌라이의 우대가 일본 침략에 이용하기 위한 것임이 확실해졌다. 이어 귀국한 김방경은 만호 박구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떠났다. 이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흔도, 홍다구가 고려에 도착했다.

한편 충렬왕은 부마국왕 선면 정동행중서성의 인장을 받았는데 특히 부마라는 칭호는 충렬왕이 특별히 요청한 것이었다. 이러한 충렬왕의 시도는 전쟁 과정에서 혼도와 홍다구에 비해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효과는 단번에 나타났다. 충렬왕이 흔도, 홍다구와 전쟁에 관해 논의하는데 충렬왕은 남향으로 앉고 흔도, 홍다구는 동향으로 앉아 지위가 명뱅히 구분되었다. 그동안 고려왕은 원나라에서 파견된 인문들과 항상 동서로 않았는데 이번에 부마국왕이 되면서 흔도, 홍다구도 동등한 예전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고려사』의 설명은 당시 고려 지배층의 처지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번 일본 침략은 지난번과 사정이 달랐다. 결국 다자이후(太宰府) 공략이 실패한 뒤 나중에 도착한 만군들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마침 태풍이 불어 만군 대부분이 익사해 군사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흔도, 홍다구, 범문호는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지 못한 군사가 10만여 명이 넘었고, 고려의 군사도 7천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이후 김방경은 개인적으론 최상의 지위를 누렸지만 측근정치가 계속되면서 정치적 입지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김방경도 그들과 계속 대립할 수만은 없어 외손 조대간(趙大簡)을 국왕 측근인 차신(車信)의 딸과 결혼 시켰다. 당시 충렬왕은 일본 정벌의 대가로 원나라로부터 다시 부마국왕의 인장을 받았고, 응방, 게링구, 내료, 천류 등 측근들은 사패전을 많게는 수 백결, 적게는 30~40결씩 받아 챙겼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지 낳은 인근 토지의 세금도 불법적으로 거두었는데 수령들이 금지하려 하면 왕에게 참소해 죄를 받게 했다. 재상도 이들을 탄핵할 수 없었으니 김방경 또한 위축될 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방경은 1283년(충렬왕 9)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로서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한 뒤에도 김방경의 정치적 위상은 조금도 낮아지지않았다. 1295년(충렬왕 21)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불만을 품은 세자가 일시 정치를 담당하자 김방경에게 상락군 개국공의 작위를 주고 이어 식읍(食邑) 1천 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 호를 준 것은 김방경과 세자의 입장이 상통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자와 충렬왕 측근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말년을 보내던 김방경은 1300(충렬왕 26) 개경 백목동 앵계리에서 사망했다. 89세였다.


4. 역사적 평가


김방경은 무신 정권의 지배와 몽고의 침략 및 항전, 당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강화, 예상했던 원나라의 간섭, 그리고 측근정치를 경험하면서 기본적으로 무신 정권을 배경으로 성장한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강화파의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를 유지 하면서 고려 왕조의 국가적 독립성을 유지하려 해 원나라의 간섭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고려 왕조를 수호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무신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어서 국왕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도 측근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김방경은 향리에서 관료 집안으로 성장한 가계에서 태어나 수상까지 되었고 그의 출세를 계기로 아들과 사위 그리고 후손들이 다수 재추에 임명됨으로써 가계는 권문세족의 반열에 올라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선발했을 때 안동 김씨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김방경의 출세를 계기로 안동 김씨가 권문세족의 반열에 진출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김방경의 후손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건국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방경은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된다.

김방경에 대한 연구는 문집이 남아 있지 않아 사상이나 정신세계를 알기가 어려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부분 삼별초의 난이나 일본 침략에 참여한 활동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몽고와의 강화, 삼별초의 난, 일본 침략, 여원 관계와 측근정치 등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거친 인물이므로, 고려 후기 역사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김방경의 생애에 대한 이해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ㆍ원자료

『高麗史』 『高麗史節要』『動安居士集』『陽村集』『東文選』『氏族源流』


ㆍ논저

민기.「김방경(1212~1300) 몽구를 극복한 용장」.인물한국사 2  박우사 1965

이상철.「김방경 연구」.청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6

민현구.「몽고군ㆍ김방경ㆍ삼별초」. 한국사시민강좌 8.  1991

윤애옥.「김방경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93

류선영.「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 활동과 그 성격」.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3

권선우.「고려 충렬왕대 김방경 무고 사건의 전개와 그 성격」. 인문과학연구 5. 동아대학교. 1999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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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참고자료까지 정리된 충렬공 전기!!!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전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더 풍부하고 완벽한 전기가 나와야 할텐데.....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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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5회의 걸친 김방경 전기 연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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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종편인가 봅니다. 종합하여 자료실에 올리겠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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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