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정기산행 후기 (철원 명성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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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5 18:33 조회1,496회 댓글2건본문
민통선 안으로 진입.
인적 드물고 한적한,
약간은 스산하게 내려앉은 시골풍경
저멀리 낮은 구릉을 타고 앉은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빛바랜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왔던 곳
<김응해 장군 묘역>
차 한대 겨우 들어가는 농로길을 출렁출렁 들어간다.
묘역 입구에 김응해(1588~1666) 장군 신도비가
길쭉하니 우뚝하다.
웅장하고 높직한 좌대. 여기저기 총탄자국.
趙絅(1586~1669) 찬, 朴○俊 전 서
묘역 상단에는 김응해 장군 묘소와 묘비
역시 높직한 좌대와 총탄자국.
앞면 글씨는 깊고 날카롭다.
5세손 榮遇 지, 尹得養 서, 숭정3辛巳(?1761년) 각
둘째줄 묘단 좌측에 조그만 봉분 둘.
김응해 장군 처 조부모, 처 부모 4위 묘소
12대째 외손봉사해 오고 있단다.
이곳에서 10리 능내라는 곳에서
문인석 4개와 함께 옮겨 왔다고
그 오른쪽 납골묘
재은 님 10대조부터 부모까지 26기 봉안
그 오른쪽 金克鍊(김응해 장군 외아들) 묘와 묘비
尹得養 서, 숭정3신사(?1761년) 追 각자
그 오른쪽으로는 납골묘가 새로 조성되었는데
앞으로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란다.
세째줄 묘단 좌측 金世章 묘비
李宅仁 기, 불초손 浚 근표, 尹志大 근서,
숭정기원 再을사(?1725년) 12월
그 오른쪽 김세장 배위 묘비.
숭정 再경신(?1741년) 尹淳(1680~1741) 서, 榮遇
그 오른쪽으로는 金重九 묘비
尹光紹(1708~1786) 찬, 曹允亨(1725~1799) 서병전,
조선402년(?1794년) 손 廷遇 출財力
아래쪽 망배단과 김응해 장군 세장비. 2001년 재은 립
그리고 맨 아래에는 김응해 장군 신도비
계속되는 긴장감과 설레임 속에
거대한 묘역과 웅대한 석물들
그리고 총탄자국과 상흔의 아픔
갑자기 흥분되고 발걸음들이 부산하다.
오르락 내리락 촬영해대고, 왔다갔다 기록해대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들
다시 김응하 장군 묘역으로
<김응하 장군 묘역>
1km남짓 떨어진 곳에
구릉을 제법 경사지게 타고 앉은 묘역
입구에는 웅장한 김응하(1580~1619) 장군
신도비가 안내하고 있다.
웅장한 좌대와 비신, 역시 총탄자국 가득하고
趙絅(1586-1669) 찬,
李裕承(1835-?) 서, 趙熙一(1869대사성) 전,
대한광무3년(1899) 기해 11월 鄭基會(1829-?) 추기
묘역 상단에는 김응하 장군 묘소
요동의 벌판에서 모셔온 초혼과 의관으로 쓴 묘
묘소가 왜소하다.
무인의 대명사 충무공의 묘역에 무인석이 없다.
둘째줄 묘역 좌측에 大孝 金應洛 묘와 묘비
아주 조그만 묘소이다.
응하,응락,응해 3형제는 임진왜란때
14살, 12살, 6살이었다고.
부모님(金地四)이 위독하시자
둘째 응락은 당시 12살임에도 단지하여 요절.
이어 하루 이틀 간격으로 부모 또한 돌아가시어 3초상이 났다고.
응락 묘비는 2001년 재은 립
그 오른쪽은 3형제의 부모이신 金地四 묘소
재은 님의 선조 소개가 이어진다.
부사공(휘 천순)께서는 여조에 밀직부사이었으나
여선교체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고
손자 大來는 결성면(현 충남 홍성)에서 학덕이 높아
세종이 집현전을 확충할 때 박팽년에 의해 천거되었다고.
세째줄 묘역에는 金益鍊(김응하 장군 1자) 묘소
그리고 맨 아래 입구에는 金應河 장군 신도비
동행한 헌병은 교대시간이 지났다고 재촉하고
아쉬움을 잔뜩 안은채 민통선을 빠져 나온다.
막 저녁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철원들판를 왼편으로 끼고 돌다
산자락 아래 구릉 위에
넉넉하게 올라 앉은 포충사에 도착
김응하 장군 혈손 규면 님(011-9185-7001)의 안내로
경내로 들어선다.
이곳 철원읍내에 거주하시며
포충사 총무를 맡고 있다고 한다.
--- 계 속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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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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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1. 상기 김응해 장군 묘비에 대하여 비를 세운 날짜는 아무리 년표를 보고 정리하려해도 정확하게 맞지 않습니다. 중국 연호와 간지, 서력년이 모두 서로 상이합니다.--- 다시 정밀 조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으로 표시하셨나 봅니다.
2. 김응하장군의 신도비는
1) 趙絅(1586-1669)이 찬한 년도와, 李裕承(1835-?) 이 서한 년도와, 趙熙一(1869대사성) 전서를 기초로 하여 분석해 볼 때 일단은 비문은 조경으로부터 받아 두었다가 1860년 경에 최초 신도비를 세운 것인 것 같고,
2)추기는 대한광무 3년(1899) 기해 11월 鄭基會(1829-?)가 찬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추기는 후(1899년)에 원 비석에 덧붙여 썼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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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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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연일 수고가 많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