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 09---기헌 김기 (琦軒 金琦, 1722~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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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6 17:40 조회1,722회 댓글2건본문
기헌 김기 (琦軒 金琦, 1722~1794)
호(號)를 기헌(寄軒) 또는 서호(西湖)라 하였고, 1722년(경종2년 임인)에 경기 여주 백양리 私第(사제)에서 안동김씨 김사경(金嗣慶)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렴사공 김사렴(金士廉)의 후손이고, 북병사와 훈련원 도정을 지낸 김공석(金公奭)의 후손이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용모가 청수하고 성도 거지(性度 擧止)가 장중 응정(莊重 凝定)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기량의 인물로 정칭(定稱)했으며, 취학 후에는 문리(文理)에 현달하여 숙사(塾師)들이 때때로 질문에 응대하지 못했고 기억력이 뛰어나 무슨 서적이나 한번 보면 모두 기억하여 동리 부노들이 모두 대과에 장원 감이라고 촉망(囑望)하였다.
그러나 18세때 과장(科場)에 나가 당시 선비들의 부정추세(不正趨勢)가 성습(成習)이 되어 썩어가는 것을 보고 향제(鄕第)로 돌아와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뜻을 굳혔으며 그는 효성이 극진하여 부공(父公) 사경(嗣慶)의 병환이 해가 지나도 낫지 않자 온천욕법이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충청도 신창현으로 부공을 모시고 이거하였다가
부공의 병환이 쾌차하자 고장(故庄)에 돌아가지 않고 충청도 옥천으로 이거하였으며, 거기서 당시의 명유(名儒) 경와(耕窩) 이명원(李命源)에게 후대를 받아 교유하면서 경전자사(經傳子史)를 위시한 제가 잡서를 통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런 공부들이 모두 성인의 도를 배우는 길이 못된다고 깨닫고 당시 기호(畿湖)에서 학행의 중망(重望)을 지고 있던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늑천(木樂,泉) 송명흠(宋明欽) 두 학자의 문에 차례로 출입하며 성학(聖學)에 전념하였다.
그뒤 상경하여 뒤에 상국(相國)이 된 죽하(竹下) 김익(金,火翌), 당시 관직에 있던 이정보(李鼎輔), 이익보(李益輔), 이?원(李?源) 등과 친교를 맺어 그들로부터 한결같이 출사(出仕)의 권고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 도를 실천할 수 없는 바에야 구차하게 벼슬자리만 지키고 앉았으면 그것은 녹(祿)과 헛된 명예만 탐내는 일이 아니겠으냐고 반문하고 사뭇 거절하였다.
그뒤 스승 송 운평(宋 雲坪)이 돌아가자 더욱 세정(世情)과 멀어져 전라도 무주 설천(雪川)에 은거하며 산수 자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유행 역질에 가족이 전염되어 8,9인이 함께 사망하자 가난과 함께 무서운 정신적 통고(痛苦)를 겪었으며,
그러면서도 안연(晏然)히 살아가는 그의 생활을 딱하게 여긴 당시의 협천(陜川)군수 심 익운(沈 翼雲)이 자기의 자질(子姪)과 향리 자제들을 보내 수업시킴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때에 급문(及門)한 제자들 중에 박치원(朴致遠), 김근추(金謹樞), 신돈항(愼敦恒) <연암집 열녀 함양박씨전에서 입언지사(立言之士)라고 칭도(稱道)된 학자> 등은 모두 둔세(遁世) 구학(究學)한 평민 학자들이었다.
44세 되던 영조 41년에 부상(父喪)을 당하자 가난한 생활을 잘 아는 沈 군수의 주선으로 장례를 마쳤으며, 그뒤 충청도 영동에 이거하여 상배(喪配)한 백씨(伯氏) 첨지공(僉知公)의 8세된 아들을 데려와 무육(撫育)하여 성취시키고, 만년에는 사뭇 영동에 우거(寓居)하면서 향리 사족 학자들과 교유하며 강학영시(講學詠詩)로 여생을 마쳤다.
尹씨, 吉씨, 郭씨 3配에서 동열(東說), 동우(東祐) 두 아들을 두고 73세로 1794년(정조18년 갑인)에 졸하였다. 묘는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이며, 은진(恩津) 송재욱(宋在郁)이 찬(撰)한 표(票)가 있다.
[참고문헌] <기헌유고>(김기)
기헌 김기(1722~1794)의 漢文小說
그는 고전(古典) 한문소설(漢文小說) 2편을 남기고 있는데, 유고(遺稿) 기헌유고(寄軒遺稿)에 황생전(黃生傳)이란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북벌론을 비판하고,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고소설분야에서 관심을 가지는 정생전(丁生傳)이라는 작품은 작자 김기(金琦)의 유고가 간행될 때에도 수록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 가중(家中)에서 단본(單本)으로 필사(筆寫)되어 전해지던 것이다. 애정소설이기 때문에 문집을 간행할 때 의도적으로 뺀 것 같다. 이 작품은 사족(士族) 남성과 중인(中人) 여성간의 애정 갈등을 조명한 작품으로 18세기 한문 소설사에서 한 자리를 지킬만한 중요한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정생전은 1970년대 초반 송준호 성신여대 교수가 입수한 것으로, 총 72면, 매면 12행, 매행 18자 평균으로 필사(筆寫)되어 있는 유일본(唯一本)이다. 글자수가 15,900여자 (評言 351자 제외)에 달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연구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
유고 문집 기헌유고(琦軒遺稿)는 1959년에 5세손 김사기(金思夔)가 4卷1冊(127張)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서(序)는 송재식(宋在植)이, 발(跋)은 五世孫 김사기(金思夔)가 찬하였다.
<정생전 연구논문>
◇失意의 美學 -미발표 한문소설 丁生傳 考- (송준호) : 연세어문학 제5집 (1974,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丁生傳에 나타난 愛情과 孝의 意味 (이신성) : 釜山漢文學硏究 v.3 (1988, 부산한문학회)
◇丁生傳 解題 (김기동) : 國語國文學論文集 v.12 (1983,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古典漢文小說選 (1984.3, 김기동, 교학연구사)
댓글목록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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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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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헌(김기) 선조님에 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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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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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