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해의 [해동금석원] 발간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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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09 17:13 조회1,932회 댓글2건본문
□ 완당평전1 (2002, 유홍준, 학고재)
p.250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완당을 중심으로 한 청조 경학, 금석학, 고증학과의 교류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문물 역시 저쪽으로 전해지고 거기에 감동받은 학예인은 또 그 나름의 업적을 낳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희해가 펴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전8권*도134 이다.
이 책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정림사 오층석탑 탑신부에 새긴 글), 봉덕사 에밀레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등 우리나라 고비(古碑), 고종(古鐘)의 금석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그가 조선 땅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으면서 조선에서도 발간하지 못한 이런 저술을 펴냈다는 것은 조,청간의 학예 교류가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반증해 준다.
유희해는 산동성 명문 출신으로 유명한 서예가인 석암 유용의 손자이다. 그는 금석문을 좋아하여 서가에 탁본이 가득했고 희대의 귀중본인 한나라 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의 송나라 때 탁본까지 소장했을 정도였다. 그 소장품이 물경 4000여 점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자연히 조선의 금석에까지 뻗쳤다.
유희해가 조선의 금석을 접한 것은 운석 조인영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조인영은 1815년에 동지부사로 떠나는 계종형 조종영(趙鍾永)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을때 유희해와 사귀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조선 금석 탁본 수십 종을 선물하여 깊은 인연을 맺었다. 조인영은 이때 한창 금석에 매료되어 귀국후 완당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조인영은 그후 자신이 이미 준비해둔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유희해는 또 1822년에 연경에 들어온 완당의 부친 김노경, 아우 김명희와 친교를 맺고 조선 금석 탁본을 기증받았으며 완당과도 서신으로 학예를 교류했다. 그리고 1830년, 완당에게 보낼 [황청경해]를 완상생에게 넘겨받았다는 편지를 보낼 때는 조선 금석 탁본 수십 종을 사서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릉비 /각각 김유신묘 십이지상 /강진 백련사 대자액(大字額) /봉암사 지증대사비 /봉암사 앞 바위의 야유암(夜遊岩) /가야산 홍류동의 최치원 칠언시.....
또 이 편지에서 유희해는 완당에게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좋음을 칭찬하면서 평백제비는 새로 정착(精拓)한 것을 원하며, 법천사 지광국사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완당의 글씨와 그림이 모두 최상에 있다는 칭찬과 함께 자신이 비문을 읽고 있는 그림 <추야독비도>(秋夜讀碑圖)를 한 폭 그려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럴 때면 완당은 그의 부탁을 모두 들어준 것 같다.
이런 정성으로 유희해는 조선의 금석 탁본을 모으고, 모르는 글자는 편지로 묻고, [고려사], [해동역사] 등 문헌자료를 사서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가야산 최치원의 시를 새긴 글씨 옆에 있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누구냐고 질문도 하고, 조인영이 일본 미농지(美濃紙)에 동해척주비를 정탁해 보내주었다는 식으로 기록하면서 조선 금석문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수집하였다.
유희해는 이렇게 수집한 조선의 비문 탁본을 정리하여 마침내 책으로 편찬해낼 뜻을 세웠다. 그것은 1830년 10월 29일자로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뜻을 밝히고 그가 필요로 하는 비문 탁본을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다. 유희해는 이 편지에서 완당에게 자신이 조인영, 김명희 등과 금석 인연을 맺게 되어 해동제각(海東題刻)을 대신 수집해준 내용을 책의 제사(題辭)로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완당은 부친이 유배중이었기 때문인지 그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대신 완당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책머리에 제시(題詩)를 써준 것이 실려 있다. 그 날짜는 1831년 1월 23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유희해는 [해동금석원] 전 8권의 편찬을 마쳤다. 어떤 면에서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은 조인영의 [해동금석존고]의 중국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유희해의 정성과 노력은 대단하고 또 대단한 것이었다. 유희해는 이렇게 열심히 [해동금석원]을 편집해 놓았지만 출간을 보지 못한채 1852년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원본은 이후 남의 손에 들어갔고, 1860년 북경의 병화(兵火)로 불타버렸다는 소문과 함께 유희해가 쓴 발문만이 1873년에 출판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소장자가 출판할 힘이 없어 거짓말한 것이고 이내 책으로 발간되어 1881년에 제4권까지 나온 다음, 1922년에 유승간(劉承幹)이 가업당(嘉嶪堂)에서 완간하고 보유(補遺) 6권, 부록 2권까지 펴냈다. 이것이 희대의 명저 [해동금석원] 발간 조성기이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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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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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금석원이라...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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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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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해동금석원> 속에 놀랄 만한 보물이 또 숨겨 있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