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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군 김방경 장군(1) - 권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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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1-30 10:35 조회1,610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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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전 안동문화원에 주문한 안동문화 제12집이 도착했습니다.

안동문화 제12집에는 향토사학자 권오신님께서 기고하신 ‘상락군 김방경 장군’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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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식 선생은

시인, 향토사학자,  안동문화원 운영위원이시며, 현재 경안안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십니다.

<안동의 전탑 및 법림사와 양지법사> <성주신앙의 역사적 배경과 실체> 등 많은 향토 자료를 연구 발표하신 바 있습니다.

안동문화 제12집에 실린 <상락군 김방경 장군>은 5~6년 전 안동교육청에 위촉받아 중ㆍ고교생 교육용 인물교재를 목적으로 쓰셨다합니다.
그러나 소위 민중사학자들의 반대(삼별초를 토벌했다는...)에 부딪쳐 교재로 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시대가 그랬다고 부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글을 발표할 시대도 되었고 마침 안동문화원의 부탁으로 안동문화에 기고하셨다 합니다. 5~6년 전에 쓰신 글이라 우려가 된다 하시며 고려사와 안동김씨족보를 토대로 글을 쓰셨다하셨습니다.

안동김씨 홈페이지에 게제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권오식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본래 사진은 흑백으로 게제 되었으나 칼라로 바꾸었고 주석은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3~4회로 나누어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상락군 김방경 장군

 

                                                             권 오 신

                                                       (경안중학교 교사)


1. 그가 살던 시대 상황

김방경 장군의 영정
 
13세기의 고려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내우외환의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문(文)만 승상하고 무(武)를 멸시하는 데에 반감을 품고1170년(의종 24년)에 정중부(鄭仲夫)가 일으킨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는 등 국정을 제멋대로 하여 그 전횡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서 굶주리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쫓겨난 문인(文人)들은 세상에 뜻을 잃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특히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은 이후는 최우(崔瑀 : 후에 怡로 개명), 최항(崔沆), 최의(崔?)의 4대가 대를 이어 60여 년 간 권력을 독점했다.  

  밖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대제국 몽고는 1231년(고종31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30여 년 간 여섯 차례나 침입을 계속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이는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약한 것을 알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가며 대몽 항쟁을 벌였다. 우리 고려는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군관민이 힘을 합해 용감히 몽고에 대항하여 때로는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세계 대제국인 몽고와 대적하기에는 고려는 너무 힘이 약했다.

특히 강화 천도로 정부 관리들과 그 가족들은 섬에서 몽고의 위험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으나 섬을 제외한 전 국토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몽고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갖은 노략질을 다 하였다.

이러한 국난 중에 토탄에 빠지고 희생당하는 것은 죄 없는 백성이었다. 아무 실권 없는 왕실도 무신 정권과 몽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사직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80평생을 바친 분이 우리 고장이 낳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이다.



2. 출생과 성장


 김방경은 본관은 안동(安東 : 김선평의 안동김씨와 구분하여 구안동 또는 상락김씨로 불림)이고, 자는 본연(本然)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안동김씨보’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둘째 아들인 숙승(叔承)을 시조로 한다. 김방경의 가계(家系)는 본관이 ‘안동’이고, 고조 이청(利請)이 안동 태수를 역임하고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해진 것으로 보아 김방경 이전부터 대대로 안동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김방경의 조부
민성(敏成)1)은 풍산(豊山) 회곡(檜谷)에 거주하였으며 두 아들 창(敞)2)과 효인(孝印)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김방경은 효인의 장자로 1212년(강종 1)에 안동 회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효인은 성격이 엄하고 강직했으며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어 당시의 대학자요 문장가인 금의(琴儀 )문하에서 배웠으며 글씨를 잘 쓰고 등제 후 관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 지제고(翰林學士 知制誥)에 이르렀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방경의 어머니가 방경을 잉태했을 때 가끔 구름이 안개를 잡수시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나의 입과 코에는 항상 코에 남아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중에서 점지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경은 어려서부터 그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으며, 풍채가 늠름하였다. 아버지가 외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관계로 주로 낙동강 변에 자리한 안동 회곡(檜谷) 마을에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방경은 조금만 화가 나도 반드시 거리에 누워 울었는데 지나가던 마소가 아이를 피하여 가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고 한다.
1) 안동김씨보에 의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翰林直史館 兼 掌冶署令을 역임하였다고 되어있다.
2)初名은 孝恭으로 고려 희종 때 급제하여 尙書右丞ㆍ太師門下侍郞判使部事 역임.


3. 벼슬길에 나아감
 

김방경은 1227년(고종 14) 16세의 나이로 음보(蔭補) 산원(散員)겸 식목녹사(式目綠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의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어린 나이지만 충직하게 일을 잘 처리하며 바른 말을 잘하는 그의 곧은 성품을 사랑하여 예(禮)로써 대우하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도맡아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이르러 우창감(右倉監)이 되었는데 일체의 청탁을 배격하고 국고를 풍부히 하는데 힘썼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어느 재상이,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근무가 착실하지 못하다.” 고, 권신(權臣)에게 참소했다. 그 말을 들은 권신을 김방경을 징계하려,

“그대는 복무 자세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이 들리는데…….

하였다. 이에 방경은,

“전임 어사처럼 근무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고, 다만 국고를 채우고 지키는 무거운 책무에 충실하려 하니, 사람마다의 입맛을 모두 맞게 해 줄 수 가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권신과 참소하던 이가 모두 부끄러워했다. 그 뒤 규정대로 양곡(糧穀)을 관리하니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다.


 

4. 위도의 개펄에서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오고타이가 1230년 친히 금(金)나라를 치는 한편 다음해인 1231년(고종 18) 살레타이(撒禮塔)에게 군대를 주어 제 1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게 하였다. 고려군은 구주(龜州 : 현 평북 龜城)와 서경(西京 : 현 평양) 등에서 완강히 저항했지만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철주(鐵州 : 현 평북 鐵山)를 함락시키며 물밀 듯이 남으로 밀려왔다. 추운 겨울 몽고군에게 겹겹으로 둘러싸인 구도 개경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마침내 고려는 많은 예물을 주고 몽고에게 항복을 하여 살레타이는 개경과 여러 주현(州縣)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계속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자 당시의 집권자 최이는 몽고와 장기 항전을 위해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1232년 강화 천도를 안 살레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해전에 미숙한 몽고군은 강화도는 쳐들어가지 못하였으나 대신 내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갖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많은 재산과 소중한 보물이 약탈당하고, 대장경이 불타고, 황룡사 9층탑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다.

1차 몽고 침입 무렵인1231년 김방경은 20세의 나이로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수차례 침략 속에서 백성들이 집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유리걸식하는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백성을 가난에서 구할 것인가 생각하였다. 강도 정부에서는 몽고병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계(北界 : 현 함경. 평안도)의 백성들을 황해의 여러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는 이 때 주민들을 인솔하여 위도(葦島)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위도의 지형이 평탄하여 개간할 수 있는 곳임에도 10여 리나 바닷물이 들어와 개간할 수 없음을 알고 백성을 시켜 제방을 쌓고 곡식을 파종케 하였다. 백성들은 몽고병의 말발굽을 피해 위도로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김방경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괴롭게 여기던 백성들도 가을에 크게 수확하게 되자 한 마음으로 개간에 힘썼다. 육지를 차지한 몽고병은 여러 해를 물러가지 않고 섬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육지로 물을 길러갔던 주민들이 몽고병에게 포로로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김방경은 저수지를 만들어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게 하여 물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김방경이  한 일은 이와 같이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 이 때 김방경이 백성을 위해 목민관으로서 행한 선정은 백성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후일 김방경이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을 때 서북 여러 성의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려 그에게 보답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김방경은 내직으로 들어와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다. 그 때 금위(禁衛)의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만 하고, 숙직(宿直)하는 방이 좁고 불편하다고 모두 자기 집에서 자고 궁성 수비를 등한시 했다. 이에 분개한 김방경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며, 병이 나도 휴가를 얻지 않고 직무에 충실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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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우리 문중의 영원한 고향!!! 안동 지방의 향토자료지에 올라온 충렬공 할아버지 소식!!! 감격! 감읍!
---이런 어려운 시기에 사직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80평생을 바친 분이 우리 고장이 낳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이다.---
발용 형님! 아주 기분 좋은, 아주 신나는 자료집입니다. 다음 이야기도.....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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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안동에는 이를 계기로 &lt;충렬공 김방경 기념사업회&gt;가 발기되고 큰 활동이 일어나길 고대합니다.
권오식 선생님을 시작으로 안동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학술발표회가 지금부터 일어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읍시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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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전 자료가 올려지면 홈에 올리겠습니다. 발용 대부님 워드화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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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방경 기념사업회가 빨리 일어나서 활동되도록 기원합니다.

많은 글 워드화 하시느라 손가락에 쥐 나셨겠네요.  감사..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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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충렬공 김방경 기념사업회 라.... 눈이 번쩍 뜨입니다.

김태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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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권오신선생님은.. 제 중학교 은사님이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