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군 김방경 장군(2) - 권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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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1-31 06:43 조회1,454회 댓글3건본문
5. 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1257년(고종 44) 몽고와의 전쟁을 주장하던 실권자 최항(崔沆)이 죽고, 그의 비첩(婢妾) 소생인 최의(崔?)가 뒤를 이었으나, 이듬해 유경(柳璥), 김준(金俊 : 일명 仁俊) 등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4대 60년에 걸쳤던 최씨 무단 정치는 종막을 고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이 복귀되었다.
1259년 고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몽고에서 귀국한 태자 전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이다. 김방경도 1263년(원종 4)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승진되어 대각에 출입하니 그 청직공정(淸直公正)함이 조야에 알려졌다. 이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선군별감사(選軍別監事)를 겸하자 매일 첫닭이 울면 선군별에 나가 송사(訟事)를 판결하고, 날이 밝으면 어사대로 나가 기강을 준엄하게 다스렸다.
당시 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가 오랫동안 관리들의 인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여러 관리들이 그 위풍에 눌려 아첨을 하였다. 김방경이 등청(登廳) 길에 그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揖)만 하고 지나가려 하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杉)으로 왕명을 받드는 사람이라 3품관 이하는 피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유독 그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대하는가?” 하고 힐책했다.
이에, 김방경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다만 그대가 왕명을 봉행하고 있으니 내가 먼저 예를 행할 따름이다.”
하며 서로 한참 다투다가,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고 가니, 유천우는 깊이 앙심을 품고 김방경의 친족 중에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억제하여 등용하지 않았으나 김방경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김방경은 1265년 광평공(廣平公) 순(恂)을 모시고 사은사(謝恩使)로 몽고의 수도인 연경(燕京 : 현 北京)에 다녀왔다. 1268에는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중방(重房)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때 1군의 상장군이던 반주(班主) 전빈(田? : 몽고사람))이 선배인데도 김방경의 아래에 있음을 꺼려 권신(權臣)에게 무고하여 남경 유수(南京留守)에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배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의 사람들이 진정이 자기 고을에 와 달라고 하여 남경에 부임한 지 3일만에 다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269년 김방경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 당시의 조정은 전에 최의(崔?)를 살해하여 왕정 복귀에 공이 컸던 무신(武臣) 김준(金俊)이 권력을 잡고 무신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해 강경론을 펴고 있었다. 문신(文臣) 이장용(李藏用)이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다. 강경론과 화친론은 전화(戰禍)에 시달리는 고려로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정책 대결이었다. 다만 어느 것이 현 시국에서 더 바람직하고 현실성이 있는 정책인가가 중요할 뿐이었다.
1260년(원종 1)새로 등극한 쿠빌라이는 고려를 정벌한 후 일본 정벌의 야욕을 품고 있었다. 1266년 쿠빌라이는 사신 흑적(黑的)과 은홍(恩弘)을 고려에 보내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려고 하니 고려가 길안내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간의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고려로서는 그 전쟁의 뒷감당을 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노련한 이장용은 몽고 사신 흑적과 은홍을 일본에 보내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들을 거제도 앞바다롤 보내어 파도가 거센 것을 보게 하여 되돌아가게 하였다.
1269년 몽고는 또 흑적과 은홍을 고려에 보내어 고려의 길안내로 일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몽고의 요구를 들은 체도 하지 안했다. 몽고는 일본을 치겠다고 수많은 선박과 물자를 요구하는 고려만 중간에 끼어 진퇴양난 이었다. 1269년(원종 10) 6월 김준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무신 임연(林衍)은 원종이 자기를 꺼려함을 알고 삼별초(三別抄)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우고 원종을 별궁(別宮)에 가두었다. 이에 이장용과 김방경은 비밀리에 원종을 알현하고 복위에 힘쓸 것을 다짐하였다. 이때 왕세자(뒤에 충렬왕)가 몽고에서 돌아오다가 의주(義州)에서 정변소식을 듣고 다시 몽고로 돌아가 세조에게 임연을 치고 원종을 복위시켜 줄 것을 청하니 몽고에서는 몽구토(蒙哥篤)를 보내어 원종을 복원시켜 주기를 결정하였다. 임연은 원종 폐위에 대한 몽고의 문책을 듣고 이장용으로 하여금 몽고에 입조(入朝)하여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이에 이자용은,
“몽고 세조는 김방경의 인품을 사랑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의 말이라면 믿을 것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김방경은 대장군 최동수(崔東秀)와 같이 입조하였다. 몽고는 원종 형제 및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며 몽구토가 2천 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東京 : 현 중국 遼陽)에 이르렀다. 이때 김방경도 몽가독과 같이 동경에 와 있었다. 몽고는 한편으로 사신 흑적(黑的)을 파견하여 원종 폐립 사건을 추궁하였다. 이에 임연은 할 수 없이 흑적의 권고와 이장용의 수습책을 받아들여 원종은 5개월만에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된 원종은 몽고를 무마하여 일본원정에 따른 부담을 면해보려고 복위 4일 만에 이장용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이자용이 강도(江都)를 떠난 직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 최탄(崔坦)이 임연을 징토 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켜 서북각지의 수령을 죽인 뒤 몽고에 투항함으로서 일시에 서경(西京 : 현 평양)을 비롯한 서북 50여 성이 몽고의 영토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라 개칭하고 최탄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이에 원종은 내우외환을 해결하기 위하여 직접 몽고로 갔다 1270년 1원 1일 새해, 원종은 이국(異國)의 눈벌판에서 마중 나온 이장용, 김방경과 눈물의 재회를 하였다.
원종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이 연경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몽고군은 몽구토를 대장으로 고려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따라서 원종은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약속하고 되돌아왔다. 한편 동경에 남아 있던 김방경은 몽구토의 군대를 따라 고려로 돌아와 같이 서경에 머무르면서 몽고 군사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몽고군의 남하는 고려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방경의 서경에 도착하니 지방의 노인들이 다투어 찾아와 음식을 대접하며,
“공이 만약 여기 계셨으면 어찌 최탄 등의 반역 사건이 일어났으리오.” 하였다.
몽고의 압력도 견디기 힘든데 국내에서는 부몽(附蒙) 세력과 항몽(抗蒙) 세력간의 갈등도 날로 심화되었다. 무신 집권 세력을 대표하는 임연은 원종폐위도 실패로 돌아가고, 이장용 · 김방경 등에 의하여 개경으로 황도가 이루어지려 하자 더욱 항몽의 자세를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갑자기 임연이 죽고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최종적으로 개경 환도를 결정했다.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앞질러 강화도에 보내어 문무 양반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나오라고 하달했다. 이로써 강화도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으니, 무신 집권의 잔여 세력인 무신들은 개경환도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1270년(원종 31) 강화 천도 39년만에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고, 그 동안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지켜왔던 강도(江都)는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하였다.
6. 몽고와 삼별초 사이에서
삼별초(三別抄)는 원래 당시의 권력자 최우가 모아 기른 그의 사병들이었다. 처음에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한 것인데 수가 많아짐에 따라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으며, 몽고와 싸우다가 포로로 되었던 귀환병들이 신의대(神義隊)를 조직, 이를 합쳐서 삼별초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 정원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조정에서 개경 환도 문제를 논의할 때 원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신들은 개경환도를 희망했으나 삼별초의 무신들은 완강히 반대했었다. 강화도에서 중신회의를 열고 마침내 개경 환도를 결정 공고하자 삼별초는 이를 몽고에 대한 굴욕이라고 생각하고 흥분했다. 조정에서 환도에 불응하는 삼별초군의 해체를 장군 김지저(金之?)를 통해 통고하는 동시에 그들의 명부를 압수해가자 혹시 그 명부를 몽고에 넘겨 자신들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6월1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주동자인 배중손(裴仲孫)은 노영희(盧永禧) · 김통정(金通精)과 의논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섬 안의 주민들이 호응하지 않고 임명된 관리들도 탈출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배중손의 삼별초군을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농토가 넓은 진도로 옮기기로 하였다. 드디어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강화에 있던 2만의 사람들과 모든 재물을 실은 1천여척의 배가 거센 파도를 해치고 뱃머리를 진도(珍島)로 향해 남으로 향했다.
몽고에 대항할 힘이 없는 원종은 이장용 · 김방경과 같이 몽고와 굴욕적인 화친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화친이 이루어지자면 항몽 세력인 삼별초군을 소탕할 수밖에 없었다. 6월 13일 개경 정부에서는 김방경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이때까지 김방경은 서경에 머무르면서 몽가독(蒙哥篤)의 군대가 대동강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미 두찬가(頭贊哥)의 군대가 개경까지 와있는데 몽가독의 군대까지 남하하면 그 피해가 더욱 심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로서는 정부군이 없어 김방경은 60여 명의 고려군과 몽고 송만호(宋萬戶)의 일천여 군과 더불어 삼별초군을 추격케 했다. 삼별초의 함선들이 남양(南陽) 앞바다 영흥도(靈興島)에 정박 중인 것을 보고 추격코자 했으나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정지시키니 삼별초군은 계속 남하하였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아 도성(都城)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남해의 거제 · 제주를 비롯한 일대의10여 섬을 세력권에 넣어 일대 해상 왕국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다 장흥 · 합포(현 : 馬山) · 금주(현 : 金海) 등 고을과 섬에 구사를 보내어 협력을 구하고 군량미를 거두어 들였다. 경상도와 제주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개경 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 육지로 나와 나주(羅州)를 함락하고 전주(全州)마저 포위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승하후 온(溫)은 황제를 칭하는 등 그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삼별초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자, 몽고는 고려 조정에 토벌을 재촉했다.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된 김방경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주야로 쉬지 않고 전주로 가며 거짓으로 글을 띄워,
"모원 모일에 1만군을 거느리고 전주에 들어갈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고 기다리라." 고 하였다.
이에 전주에서는 적도들에게 항거할 태세를 갖추었고, 나주에 침공했던 삼별초군은 겁을 먹고 진도로 물러가니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두 고을을 구할 수 있었다.
김방경은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를 향했다. 삼별초군은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바닷가에 방어물을 설치하고 향했다. 전투는 오히려 삼별초군의 선공으로 시작되고 번번이 관군이 수세에 몰렸다. 11월의 전투에서 연합군 100척과 삼별초군 30척이 접전을 벌였는데 삼별초군이 북을 치며 요란한 기세로 공격을 해 오니 몽고장수 아해는 처음부터 겁을 집어먹고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주(羅州)로 후퇴하려 했다.
“원수(元帥)가 후퇴하면 적에게 약함을 보여 적이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며, 또 황제가 알고 문책하면 무어라고 대답하겠는가?”
하며, 김방경은 그의 후퇴를 저지시켰다. 이에 아해는 김방경의 만류로 후퇴는 하지 않았느나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김방경을 원망하였다. 김방경이 고려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종일을 싸우는데, 적의 배가 사방에서 둘러싸고 반격하므로 전투가 격렬하여 장종들은 많이 죽고 다치고 화살도 다 떨여져 더 싸울 힘이 없었다. 마침내 김방경이 탄 배는 포위되고 삼별초군이 칼을 빼어 들고 배로 뛰어들었다. 살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 김방경은,
“차라리 이 한 몸을 고깃배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하며,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다. 이때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 · 허만지(許 萬之)등이 만류하고 이에 용기를 얻은 다친 군사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 간신히 적진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싸움은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때 반남(潘南) 사람인 홍찬(洪贊) ·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김방경과 공유(孔愉) 등이 적과 내통한다고 참소했다. 아해는 즉시 김방경을 잡아 가두었다. 지금까지 감찰어사, 병마판관, 어사중승 등의 벼슬을 거치면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른 벼슬아치의 본보기를 보인 김방경이 적과 내통한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해가 김방경을 잡아 가두어 개경으로 압송하니 보는 자가 다 원통하다고 하고 슬피 우는 자도 있었다. 아해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서로 김방경의 처리를 맡겠다고 다투다가 맡았다. 개경으로 잡혀간 김방경은 홍찬과 대질 신문을 한 결과 무고임이 밝혀져서 풀려나고, 무고했던 홍찬의 무리는 처형되었다. 홍찬은 삼별초군에게 붙잡혀 있다가 도망쳐 온 자였다. 그리고 아해도 원수 자리에서 쫓겨났다.
1271년(원종 12) 아해 대신 새로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된 홍다구(洪茶丘)와 흔도(?都)가 이끄는 몽고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연합해 진도를 총공격했다. 먼저 홍다구의 군대가 진도를 향해 떠나고 고려 수군300명도 그 뒤를 따랐다. 김방경은 혼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으로 쳐들어갔다. 홍다구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노루목에서 진격하고, 대장군 김석(金錫)과 만호 고을마(高乙?)는 우군을 지휘하여 동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동원된 전투함만도 1백여 척에 달하였다.
이전 전투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한 후, 관군을 가벼이 여겨 미처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공격을 받은 삼별초군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삼면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병력이 흩어진데다가, 몽고군이 화포(火砲) · 화창(火槍) · 화전(火箭) 같은 신무기를 사용해오자 싸움에 밀린 삼별초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칼에 찔려죽고, 배중손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김방경은 진도에 들어가 노획한 쌀4천 석과 강도에서 간 남녀 1만여 명, 전함 수십 척과 재화(財貨)를 개경으로 실어 보내고 양민(良民)들은 생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김방경이 개선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고 그 공을 기려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大尉中書侍郞平章事)에 봉하였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 : 현 제주도)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를 시작했다. 남해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고, 안남(安南 : 현 全州)을 침범하여 수령 공유(孔愉)를 잡아갔다. 이에 김방경은 1278년(원종 14) 행영중군 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혼도 · 홍다구와 함께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러 출발하였다.
만여 명의 수군(水軍)을 모아 반남현에 주둔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여러 도(道)에서 보낸 전함이 바람에 휩쓸려 부서지고 떠내려가고 뒤집혀졌다. 할 수 없이 군사 1만과 전라도의 전함 1백6십 척으로 추자도에 머무르면서 바람이 잦아지기를 기다리는데 밤중에 풍파가 급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날이 새어 보니 배는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으나 풍랑이 급하여 간신히 뭍에 가까이 접근했다.
연합군이 함덕포(咸德浦)로부터 들어가니 삼별초군이 암석 뒤에 숨어 있다가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김방경이 큰 소리로 휘하 전선에 일제히 전진을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도 제선(諸船)을 좇아 나아가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용감히 적진에 뛰어들고, 장군 나유(羅裕)가 예병을 거느리고 뒤따르며 적을 무찔렀다. 좌군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에 상륙하여 바로 삼별초군의 항파두성으로 무찔러 들어가니 적은 후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관군(官軍)이 외성(外城)을 넘어 사방에서 불화살을 쏘며 공격하자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삼별초군은 크게 혼란을 일으켰다.
이때 삼별초에서 투항해 온 사람이 있어,
“삼별초는 이미 궁지에 몰려 모두 도망갈 길을 찾기에 골몰하니 성안으로 들어가면 쉽게 소탕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여세를 몰아 성에 들어가니 삼별초의 군대는 무너지며 장군 김통정은 70여 인의 무리를 이끌고 산중으로 도망하고, 적장 이순공(李順恭) · 조시적(曹時適)은 항복했다. 성안에 들어가니 주민들이 두려워 통곡하거늘, 김방경은 말하기를,
“다만 괴수만 베어 죽일 것이니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사람들은 두려워 말라.”
했다. 그리고 괴수 김윤서(金允敍) 등 6인을 거리에서 목 베고, 삼별초의 친당(親黨) 35인을 사로잡고 항복한 무리 1천 3백여 인은 배에 나누어 싣고 돌아오고 원주민들은 전과 같이 살도록 했다. 또, 몽고군 5백 명과 고려군 1천 명을 머물러 진무(鎭撫)케 하고 나주에 이르러 친당 35인은 죽이고 나머지 부득이 적도에 가담한 양민과 원주민은 석방하고 불문에 부쳐 석방했다.
김방경이 개선함에 원종은,
“김방경은 진도에서부터 탐라를 침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흉적(凶賊)을 없애어 병든 것이 다시 소생한 듯하니 그 공업(功業)을 맹세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김방경을 모든 관리의 으뜸인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해 가을에 조서(詔書)를 받고 몽고에 가니 세조는 승상(丞相)의 다음자리에 앉히고 금안(金鞍) · 채복(綵服) · 금은(金銀) 등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1년 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수도 연경(燕京을 : 현 北京)을 대도(大都)라 한 세조는 삼별초가 토벌되자 일본 침략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지난 1772년 김방경과 함께 어려운 고려 사직을 지키기 위해 힘쓰던 이장용도 72세를 끝으로 병으로 죽었다. 1274년 이장용과 김방경의 두 기둥으로 하여 고려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쿠빌라이와 싸워 온 원종도 5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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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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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의 고향!!! 안동에서 살펴보는 충렬공 전기!!! 잘 보고 있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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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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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또 다른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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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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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에 대한 연구 불길이 안동에서 끝없이 타오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