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고도 가슴아픈 이야기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2-02-16 09:42 조회1,847회 댓글0건본문
비록 여성의 몸이지만 여기 자랑스런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 김재옥의 행적과 기록이
있어 향후 우리 선안동김씨 문중사 기록 정리를 위하여 소개드립니다.
▣ 김재옥 행적비 ▣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210㎝
☞ 만든 때: 서기 1976년 7월 7일
--이 비는 김재옥 여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찬양하고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충주여교사 협의회에서 세웠다. 규모는 받침돌 위에 40cm 높이의 지주를 세우고 지
주 위에 나비 155㎝ 높이 95㎝의 직사각형의 판판한 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 문】
--김재옥 교사는 1934년 3월12일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음성 여자중학교
를 거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 1950년 교사 발령을 받아 중원군 동락국민학교에 부
임한 그해 이북 공산 괴뢰의 불법 남침으로 6·25동란이 발발 7월 6일에는 이곳 동
락까지 적의 병력이 침투되었고 적의 탱크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와 장비가 본교 교
정에 집결함을 본 김교사의 기지는 날이 어두워짐을 이용하여 4킬로가 넘는 험준한
가엽산 644고지에 매복중이던 아군에게 적의 정세를 알려 불과 4백여명의 소수 병력
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19세 김재옥 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과 불타는 애국 지성에서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결과이며 이 나라의 장한 반공 여성으로서의 귀감이라고 할 것이다.
김교사는 그 후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강원도 인제 방면에 배치
되어 전방을 지키는 군인 가족이었으나 1963년 12월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재봉 사
건때 저격 대상으로 오인받아 김교사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
양하기 위하여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걸쳐 상영하였으며 동락
전투 당시 박격포 대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군을 제대 1968년 해양경찰 대장으로
재임시 고인이 된 김교사의 충혼을 달래기 위하여 본 현충비를 건립하였으나 김교사
의 당시의 행적을 기리는 자세한 연유가 없어 충주 중원 여교사회에서 당시의 통쾌
한 전첩을 거두게 한 김교사의 청사에 빛날 불멸의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노니 이 앞을 지나는 이 누구나 애석하게 고인이 된 김교사의 영전
에 읍하고 반공의 결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김을 잊지 마소서.....
1976년 7월 7일
충주여교사협의회 일동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p1324∼1325)
▣ 전 승 비 ▣
☞ 있는곳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동락초등학교 건너편 산밑)
☞ 크 기 : 전체높이 400㎝
☞ 만든때 : 서기 1973년 7월 7일
--이 비는 북괴가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때 한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
여 세운 비이다. 높이 26㎝의 계단을 5계단 쌓고 그 위에 높이 114㎝와 길이 215㎝
의 돌과 높이 280㎝ 나비 82㎝의 돌을 두 개 얹어놓아 만든 비이다. 이 전투의 약사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5일에는 음성읍 금왕
읍 무극리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도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6사단장 김종오(金
鍾五) 대령은 예하 제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여 공격
토록 명령했다. 이때 제7연대 제 1, 2, 3대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음성군 금왕읍 백
야리 및 가엽산 줄기인 644고지 등에서 매복중이었으며 명령을 받은 임부택 제7연대
장은 계획된 시간에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제1대대는 동일 11
시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중 14시 무극리 북방 2
㎞ 지점에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12시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방면으로 남진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7연대 1, 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에 돌입했으나 적은 철수하고 없
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1대대는 무극리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
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점령하여 음성 충주간 중간 지대에서 적에 대비했
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장 김종수(金鍾洙)소령은 동락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국민학교 김재옥(金在玉)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제2대대장 김종수소령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김소령은 당시 644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
었으나 김재옥 여교사의 제보에 따라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7시를 공격시간으
로 정하고 제 6, 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으며 각 중대는 공격지점
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보를
믿고 적은 안심하고 석식 준비를 하였고 경비는 소홀히 하였다. 정각 17시에 제5중
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은 대피하기에 어쩔줄
을 몰랐고 김종수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
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적의 포는 순식간에
괴멸하였다. 다음날 미명에 실시된 아군의 소탕전으로 적은 완전 섬멸되었다. 이전투
의 전과는 차량 60대, 장갑차 3대, 기관총 47정, 포 12문, 박격포 35문, 소총 1000여
정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이승만 전대통령께서는 제7연대 전장병에게 1계급 특
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된 무기는 대전에서 전시되었고 각종 무기 1점씩은 UN본
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
【비 문】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
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역적
인 남한 침공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
었던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던 바 가장 통쾌했던 것은 무극리 전투였다. 우리 국
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48
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옴으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
리와 음성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고지를 점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
국민학교에 전병력을 집결 수십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나 이를 발견
한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백명 연대의 지휘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
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침내 포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제8중대의 포탄
이 또 떨어졌다. 너무나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
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 올랐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져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굳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흘린 일을 기억케하고 조국 수호와 자유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민족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누구나 여
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합시다.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p1322∼1324)
▣ 현 충 탑 ▣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770㎝
☞ 만든때 : 서기 1968년
--이 탑은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김재옥 여교사의 업적
을 기리고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당시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가 1968년에 세웠다. 탑의 규모는 3단계의 기단위에 높이 6m의 탑신을 정사각형
으로 세우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게 만들었다.
【현충탑 건립문】
--국가에 바친 그대의 충성을 앙모하며 이곳에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비노라.
1968. 12. 17. 신 용 관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1322)
--그리고 충주 중원지 pp1112∼1113에는 제12편 인물. 270. 金在玉(1934∼1963)이 기
록되어 있는 바 위 행적비, 전승비, 현충탑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다만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득주, 김재옥 사이의 장남 이훈은 고재봉 사건 당시 서울에
유학중인 관계로 화를 면하고 생존해 있음을 밝혀둡니다.
▣ 여교사 김재옥의 세계 ▣
---자랑스런 여교사 김재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출신으로서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정작 문온공파세보(1992년 임신)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향후 파보 또는 대동보 편찬시 삽입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
입니다.
● 먼저 재옥아주머니의 부친 완묵공의 친가쪽 세계를 살펴 보았습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익서), 16세(시정 : 규서공의 장자), 17세(남신),
18세(찬원), 19세(호인), 20세(의신), 21세(형식), 22세(상준), 23세(완묵), 24세(재옥)
---충렬공 22세손 상준공은 순묵, 시묵, 완묵 3형제를 두셨는데 시묵공은 계족상갑
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완묵공은 계족숙부상익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각각 입호되었습니다. 완묵공은 재옥 따님외 아들이 없어 맏형 순묵공의 차자 재
혁을 다시 양자로 입호하였는데 상평리 남신계, 월정리 남술계 어디에도 재옥아
주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완묵공의 손자는 돈회, 덕회와 손녀 회영이
있습니다.
● 다음은 완묵공의 양가쪽 세계를 정리해 봅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규서), 16세(시형 : 시정의 아우), 17세(남술),
18세(혜원), 19세(건인), 20세(의수), 21세(주식), 22세(상익), 23세(완묵), 24세(재옥)
이러한 사실은 문온공파세보(1992)를 바탕으로 재옥아주머니와는 친가쪽 8촌간이
며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음성공종회 명예회장(초대회장)이신 저의 숙부 재용어른
의 증언을 통하여 기록하였음을 부기합니다. "끝"
있어 향후 우리 선안동김씨 문중사 기록 정리를 위하여 소개드립니다.
▣ 김재옥 행적비 ▣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210㎝
☞ 만든 때: 서기 1976년 7월 7일
--이 비는 김재옥 여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찬양하고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충주여교사 협의회에서 세웠다. 규모는 받침돌 위에 40cm 높이의 지주를 세우고 지
주 위에 나비 155㎝ 높이 95㎝의 직사각형의 판판한 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 문】
--김재옥 교사는 1934년 3월12일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음성 여자중학교
를 거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 1950년 교사 발령을 받아 중원군 동락국민학교에 부
임한 그해 이북 공산 괴뢰의 불법 남침으로 6·25동란이 발발 7월 6일에는 이곳 동
락까지 적의 병력이 침투되었고 적의 탱크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와 장비가 본교 교
정에 집결함을 본 김교사의 기지는 날이 어두워짐을 이용하여 4킬로가 넘는 험준한
가엽산 644고지에 매복중이던 아군에게 적의 정세를 알려 불과 4백여명의 소수 병력
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19세 김재옥 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과 불타는 애국 지성에서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결과이며 이 나라의 장한 반공 여성으로서의 귀감이라고 할 것이다.
김교사는 그 후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강원도 인제 방면에 배치
되어 전방을 지키는 군인 가족이었으나 1963년 12월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재봉 사
건때 저격 대상으로 오인받아 김교사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
양하기 위하여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걸쳐 상영하였으며 동락
전투 당시 박격포 대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군을 제대 1968년 해양경찰 대장으로
재임시 고인이 된 김교사의 충혼을 달래기 위하여 본 현충비를 건립하였으나 김교사
의 당시의 행적을 기리는 자세한 연유가 없어 충주 중원 여교사회에서 당시의 통쾌
한 전첩을 거두게 한 김교사의 청사에 빛날 불멸의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노니 이 앞을 지나는 이 누구나 애석하게 고인이 된 김교사의 영전
에 읍하고 반공의 결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김을 잊지 마소서.....
1976년 7월 7일
충주여교사협의회 일동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p1324∼1325)
▣ 전 승 비 ▣
☞ 있는곳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동락초등학교 건너편 산밑)
☞ 크 기 : 전체높이 400㎝
☞ 만든때 : 서기 1973년 7월 7일
--이 비는 북괴가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때 한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
여 세운 비이다. 높이 26㎝의 계단을 5계단 쌓고 그 위에 높이 114㎝와 길이 215㎝
의 돌과 높이 280㎝ 나비 82㎝의 돌을 두 개 얹어놓아 만든 비이다. 이 전투의 약사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5일에는 음성읍 금왕
읍 무극리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도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6사단장 김종오(金
鍾五) 대령은 예하 제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여 공격
토록 명령했다. 이때 제7연대 제 1, 2, 3대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음성군 금왕읍 백
야리 및 가엽산 줄기인 644고지 등에서 매복중이었으며 명령을 받은 임부택 제7연대
장은 계획된 시간에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제1대대는 동일 11
시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중 14시 무극리 북방 2
㎞ 지점에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12시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방면으로 남진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7연대 1, 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에 돌입했으나 적은 철수하고 없
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1대대는 무극리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
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점령하여 음성 충주간 중간 지대에서 적에 대비했
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장 김종수(金鍾洙)소령은 동락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국민학교 김재옥(金在玉)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제2대대장 김종수소령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김소령은 당시 644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
었으나 김재옥 여교사의 제보에 따라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7시를 공격시간으
로 정하고 제 6, 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으며 각 중대는 공격지점
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보를
믿고 적은 안심하고 석식 준비를 하였고 경비는 소홀히 하였다. 정각 17시에 제5중
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은 대피하기에 어쩔줄
을 몰랐고 김종수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
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적의 포는 순식간에
괴멸하였다. 다음날 미명에 실시된 아군의 소탕전으로 적은 완전 섬멸되었다. 이전투
의 전과는 차량 60대, 장갑차 3대, 기관총 47정, 포 12문, 박격포 35문, 소총 1000여
정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이승만 전대통령께서는 제7연대 전장병에게 1계급 특
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된 무기는 대전에서 전시되었고 각종 무기 1점씩은 UN본
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
【비 문】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
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역적
인 남한 침공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
었던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던 바 가장 통쾌했던 것은 무극리 전투였다. 우리 국
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48
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옴으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
리와 음성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고지를 점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
국민학교에 전병력을 집결 수십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나 이를 발견
한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백명 연대의 지휘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
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침내 포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제8중대의 포탄
이 또 떨어졌다. 너무나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
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 올랐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져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굳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흘린 일을 기억케하고 조국 수호와 자유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민족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누구나 여
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합시다.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p1322∼1324)
▣ 현 충 탑 ▣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770㎝
☞ 만든때 : 서기 1968년
--이 탑은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김재옥 여교사의 업적
을 기리고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당시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가 1968년에 세웠다. 탑의 규모는 3단계의 기단위에 높이 6m의 탑신을 정사각형
으로 세우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게 만들었다.
【현충탑 건립문】
--국가에 바친 그대의 충성을 앙모하며 이곳에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비노라.
1968. 12. 17. 신 용 관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1322)
--그리고 충주 중원지 pp1112∼1113에는 제12편 인물. 270. 金在玉(1934∼1963)이 기
록되어 있는 바 위 행적비, 전승비, 현충탑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다만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득주, 김재옥 사이의 장남 이훈은 고재봉 사건 당시 서울에
유학중인 관계로 화를 면하고 생존해 있음을 밝혀둡니다.
▣ 여교사 김재옥의 세계 ▣
---자랑스런 여교사 김재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출신으로서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정작 문온공파세보(1992년 임신)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향후 파보 또는 대동보 편찬시 삽입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
입니다.
● 먼저 재옥아주머니의 부친 완묵공의 친가쪽 세계를 살펴 보았습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익서), 16세(시정 : 규서공의 장자), 17세(남신),
18세(찬원), 19세(호인), 20세(의신), 21세(형식), 22세(상준), 23세(완묵), 24세(재옥)
---충렬공 22세손 상준공은 순묵, 시묵, 완묵 3형제를 두셨는데 시묵공은 계족상갑
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완묵공은 계족숙부상익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각각 입호되었습니다. 완묵공은 재옥 따님외 아들이 없어 맏형 순묵공의 차자 재
혁을 다시 양자로 입호하였는데 상평리 남신계, 월정리 남술계 어디에도 재옥아
주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완묵공의 손자는 돈회, 덕회와 손녀 회영이
있습니다.
● 다음은 완묵공의 양가쪽 세계를 정리해 봅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규서), 16세(시형 : 시정의 아우), 17세(남술),
18세(혜원), 19세(건인), 20세(의수), 21세(주식), 22세(상익), 23세(완묵), 24세(재옥)
이러한 사실은 문온공파세보(1992)를 바탕으로 재옥아주머니와는 친가쪽 8촌간이
며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음성공종회 명예회장(초대회장)이신 저의 숙부 재용어른
의 증언을 통하여 기록하였음을 부기합니다. "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